류희달 (柳希達)

류희달(柳希達), 죽산공(竹山公), Ryu, Hui-Dal, 생몰년:1571-1631, 세:22
宣祖朝 倡義. 左相公派, 자 중현(仲顯). 호 롱포(弄圃).

서산 자미(西山 自猸)의 6대손이요, 증공조참의절(贈工曹參儀 節)의 2자로 선조(宣祖) 4년 辛未에 나주 보현동(羅州 寶賢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훌륭하고 채기가 뛰어나더니 일찌기 척숙(戚叔) 건재 김천일(健齋 金千鎰)의 문하에 수업하여 경사(經史)는 물론 병서(兵書)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김공(金公)이 크게 사랑하였다.
25년 壬辰(1592)에 왜란이 일어나가 당시 전라병사 선거이(全羅兵使 宣居努)가 각읍의 군병을 독려하는 한편 나주(羅州)로 장교를 보내어 공을 찾아 의병을 일으킬 것을 요청하였다. 공께서 즉시 이음고을에 격문(檄文)을 보내고 주육(酒商)을 크게 갖추어 고을 객사(客舍)에 자리를 마련하고 의병을 규합하였는데 10일 이내에 의병에 참여 한자가 천 여명이요, 의곡(義穀)이 수백석에 이르렀다. 때에 현감 김억추(孫監 金億秋) , 교리 조팽년(校理 趙彭年) , 진사 임환(進士 林澾) , 참봉 황대중(參奉 黃大中) 등 39인과 더불어 회맹(會盟)하였는데 공께서 맹주(盟主)로 추대 되었으니 이른바 금릉창의(企陵倡義)이다.
27년 甲午(1594)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傅官)으로 재직중, 명(明)나라 유격장 송대빈(遊擊將 宋大贇)의 접반사(接伴使)로 발탁되어 종군하였는데, 유격장이 공의 의용(儀容)과 재략(才雲)을 장하게 여기고 매양 칭찬하였다. 때에 왜적들이 남해 고음도(南海 古音島)에 진치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다달아 4개월동안 왜적과 접전하였다. 공께서 유격장에게 이르기를 『적병은 많고 아군은 적으니 창칼로 대항함은 불가합니다. 왜적을 유인하여 깊은 여울목으로 끌어내 급히 치는 것이 상책입니다.』하였다. 드디어 그 전략을 써서 그들을 대파하여 왜장 평의익(平義益)등이 크게 패하고 달아났다. 그후 부산(釜山)으로 다달아 한달을 머물면서 왜병 수백인을 참획하고 한양(漢陽)으로 돌아오니 왕은 전공(戰功)을 치하하고 유격장을 접대하였는데 이때 공께서 따라 입시(入侍)하였다.
어전(御前)에서 유격장이 공을 가리키면서 『류모(柳某)는 큰 재질이 있어 대장(大將)에 임용할만 한데 어찌 이제껏 소관(小官)에 두십니까?』하니, 왕이 바로 해당 관서(官署)에 명하여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에 승진시킴과 동시에 궁시(弓矢)를 하사하고, 이로부터 사신(使臣)의 왕래가 있을 때마다 매양 접반사로 참여토록 분부하였다.
33년 庚子(1600) 봄에 죽산현감(竹山縣監)에 제수되어 부임하였다. 당시 병란을 겪은 직후라 사신의 왕래가 빈번하였는데 공께서 접대함이 근실하고 규모가 있으므로 상사(上使)가 매양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동년 7월 의인왕후 박씨(懿王后 朴氏)의 인산(因山 : 國葬)에 역부(役夫)를 늦게 보낸 이유로 파직을 당하고 돌아오니, 고을 백성들이 울면서 이르기를 『우리 백성들에게 어진 덕이 있었다.』하고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는데 그 글은 아래와 같다.
『문장과 무예로 몸을 닦아서 나라를 위하여 공을 세웠네.
 충성과 효도를 두루 겸하여 풍속의 교화가 일치 하였네.』
<文武律身爲國樹功旣全忠孝風敎一同>

관직에서 물러난 후 나주(羅州) 고을 북쪽 장본방(章本埼). 지금 광산군 본양면 동호리 신촌(光山郡 本良面 東湖里 莘村)으로 옮겨 터를 잡아 살았는데 밤에는 밝은 달을 희롱하고 낮에는 채전을 가꾸연서 롱포(弄鬧)라 자호(自號)하였다.
광해군(光海君) 12년 庚申(1620)에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 2등에 책록됨과 아울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공은 천성이 너그러워 남과 더불어 거만함이 없었고, 만약 만나 보기를 원하면 반드시 찾아가 보므로 사람들이 그 인품을 추앙하여 마지 않았다.
인조(仁祖)9년 辛未 6월 1일에 향년 61세로 돌아가시니 동년 12월 12일 庚辰일에 북쪽으로 5리쯤 두음동(豆音洞). 지금 광산군 본양면 동림리 구룡촌 전록 병좌(九龍村 前麓 丙坐)에 안장되었다.
배위 고성이씨(固域李氏)는 별좌 안중(別坐 安中)의 따님으로 자녀를 두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셔 후에 합부하였다. 함평이씨(咸平李氏)는 주부 몽린(主簿夢麟)의 따님으로 5남 4녀를 두었는데 공의 생전에는 착한 배필이 되었고, 사후에는 자녀를 잘 가르쳐 부덕(婦德)에 어김이 없더니 공보다 17년 후 丁亥(1647) 7월 12일에 돌아가셔 동년 12월 5일 壬申일에 부장(祔葬)하였다.
인조 26년 戊子(1648) 봄에 공의 묘소에 묘비를 세웠는데 묘갈명은 승지 기천 이희웅(承旨 杞泉 李喜熊)이 지었다.
아들은 시간(時澗) , 시필(時泌) , 시청(時淸) , 시원(時源) ,시만(時漫)인데 모두 조행(操行)이 있었고 음직(蔭職)으로 통덕랑(通德郎)이며, 사위는 진주정래창(晋州鄭來昌) , 나주정인서(羅州鄭麟瑞) , 양성이로(陽城李橘) , 서산류재서(瑞山柳載瑞)이다. 그리고 공께서 죽산에서 남은 아들 시하(時河 :초명 時澤)가 있어 무과(武科)에 급제 하였다.
정조(正祖) 때 영의정(領議政) 만포 심환지(晩圃沈煥之)가 행장을 짓고, 고종(高宗) 때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이 묘갈명추기를 지었으며, 박사 이광수(博士 李光秀)가 신도비명을 지었다.공의 신도비(神道碑)는 살으시던 마을 신촌(莘材)앞에 세워 있으며, 이곳에서 약간 떨어진 덕립사(德林祠)에 배향되어 매년 음9월 16일에 향사하고 있다.
후손은 주로 광산(光山) , 나주(羅州) , 화순(和順) , 장성(長城)에 세거하고 있다.
※ 墓碣銘. 湖南節義錄. 金陵偏義錄. 兩蹇堂寶記. 己巳譜.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