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희잠(柳希潛), 첨정공(僉正公), Ryu, Hui-Jam, 생몰년:?-?, 세:20
中宗朝 蔭仕. 忠景公派, 가정보 10권 편찬.
사헌부장령 정수(司憲府掌令 延秀)의 손이요, 감찰 환(監察 渙)의 아들로 일찌기 문음으로 출사하여 남부주부(南部主簿) , 의흥(義興) , 구성현감(龜城縣監)을 거쳐 사복시 첨정(司僕寺 僉正)으로 재임중 명종(明宗) 즉위 乙巳(1545)에 사화(士禍)가 일어나 숙부(叔父) 좌의정 송암 관(左讓政 松庵 灌)께서 피화(被禍)됨에 이에 연좌되어 의성(義城)으로 유배(流配)되었다. 적소(謫所)에서 쓸쓸하고 일이 없으므로 날마다 보도(譜圖)를 대하여 오로지 증정(證正)에 열중하는데 궁벽한 시골이라 상의할 사람이 없고 때때로 오고 가는 손님과 전임(轉任)하는 수령(寺令)이 간혹 지나가면 공께서 반드시 족보(族譜)에 언급(言及)하여 그 모(某)의 후손됨을 알면 계파(系派)를 바르게 정리하되 하나를 들어 둘을 증명하고, 다섯을 들치어 열을 알아 빠진것을 보충하기 십여년의 오랜 세월을 지내었다. 당시 승지 류혼(承旨 柳澤) , 참의 류잠(參議 柳潛) 형제가 공이 족보를 편찬한다는 소문을 듣고 협조하던차, 마침 류지선(柳智善)이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부임하여 경상관찰사 정언각(慶尙觀察使 鄭彦慤)과 상의하여 발간하려고 하였으나 그러나 명종(明宗) 9년 甲寅(1554)에 흉년을 만나 뜻을 이루치 못하였다.
공께서 이본(二本)을 손수 써서 일본(一本)은 참의 류잠(參議 柳潛)에게 보내어 후일 인쇄(印刷)하게 하고, 일본은 공이 소장하여 자손들에게 전하였다. 그 후 항재 정종영(恒齋 鄭宗榮)이 경상관찰사(慶尙觀察使)로 왔는데 바로 공의 종매부(從妹夫)로써 지필(紙筆)을 보내어 일본을 써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공께서 등사(謄寫)의 노고를 꺼리지 않고 써보내 주었으니 공께서 전후 3볼을 손수 쓰신 셈이다.
20년 乙丑(1565)에 수졸재 이우민(守拙齋 李友閔)이 경상도관찰사(褻尙道觀察使)로 왔는데 역시 류씨(柳氏)의 외손(外孫)으로서 이 수초본(手抄本)을 보고 그대로 둘수 없다 하고 전라도관찰사 남궁 침(全羅道觀察使 南宮 ?)과 충청도관찰사 류 잠(忠淸道觀察使 柳 潛)에게 서신을 보내어 간행할것을 통고하고, 대승공(大丞公)의 내외후손(內外後孫)으로 삼도(三道)에 재임중인 수령(守令) 및 도사(都事) , 판관(判官) , 찰방(察訪) , 병사(兵使) , 수사(水使)에 이르기까지 계파(系派)의 친소(親疎)와 내외척(內外戚)의 원근(遠近)을 막론하고 각기 형편대로 희사(喜捨)를 받았다. 이에 호응한 수가 무려 191인이었다. 그리고 경상도(慶尙道) 40여 고을에서 48명의 각수(刻手)를 동원하여 착수한지 수개월 만에 완간(完刊)을 보게 되니 때는 乙丑 4월로서 족보를 편찬하기 24년 만에 완성된 바 이것이 『嘉靖譜』 10권이다. 특히 이 사업에 공의 2자 융(瀜)이 음식 공봉(供奉)에서부터 갖가지 주선을 다하고 발문(跋文)을 지어 부쳤다.
배위 나주주씨(羅州朱氏)는 판관 맹운(判官 孟雲)의 따님으로 3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충(沖) , 융(瀜) , 풍(灃)이며, 사위는 군수 이충량(郡守 李忠樑) , 참봉 변 순(參奉 邊 循) , 김원경(金元慶)이다.
공의 묘소는 원래 고양 원당(高陽 元塘)에 계셨으나 실전(失傳)하고, 자손은 충청북도(忠淸北道)에 대부분 살고 있다.
※ 蒸靖譜序跋.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