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희저(柳希渚) 부제학공(副提學公), Ryu, Hui-Jeo, 생몰년:1460-1535, 세:17
中宗朝 文臣. 夏亭公派, 자 망지(望之)
사헌부감찰 삼(司憲府監察 贂)의 손이요 고양군수 순행(高陽郡守 順行)의 장자로 세조(世祖) 6년 庚辰 윤 11월 19일 생이다.
성종 17년 丙午(1486)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연산군(燕山君) 2년 丙辰(149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5년 己未(1499) 예조좌랑(禮曹佐郎)에 기용되어 성종실록(成宗寶錄) 편찬에 참여하고, 9년 癸亥(1503) 11월에 연산군이 내한매시(耐寒梅詩)를 지어 바치라는 어명이 있었는데 공께서 짓지 않아 이로써 감옥에 갇히었다.
이듬해 3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재직중 왕의 뜻을 거슬려 의성(義城)으로 유배되었다가 동년 10월 양산(梁山)으로 옮기었다.
유배중에 11년 乙丑(1505) 8월 부친상을 당하고 이듬해 9월 반정(反正)이 일어나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즉시 풀려 분상(奔喪), 금천(衿川)으로 부친의 유해(遺骸)를 반장(返葬)하였다.
복제(服制)를 마친 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으로 재직중 4년 己巳(1509)정월 6일 주강(晝講)시에 공께서 아뢰기를 "일을 감소함이 인원을 감하는 것만 못하고 인원을 감소함이 관청을 감하는 것만 못한지라 선대 조정에서 관청을 설치한 후 직책을 분담시켰읍니다. 지금 폐조(廢朝)의 뒤라서 백성들이 궁핍하고 재물이 탕진됨이 이를데 없사오니 마땅히 모든 비용을 강소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중요하지 않은 관청을 감소할 경우 재물이 자연히 충족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전지(傳旨)를 내려 "류모의 말이 과연 옳도다"하시고 내외(內外)의 긴요하지 않은 관청과 인원을 감축하였다.
동년 7월에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에 승진하고 9년 甲戌(1514) 10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서 사신(使臣)으로 명(明)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제수되고 12년 丁丑(1517)에 경주부윤(慶州府尹)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를 거쳐 이듬해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갔다.
18년 癸未(1523) 후로 예조(禮曹). 병조(兵曹). 호조(戶曹)의 참의(參議)를 두루 거쳐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승진하였다. 29년 甲午(1534)에 양양부사(襄陽府使)로 나갔다가 내직(內職)으로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를 지내고 다시 파주목사(坡州牧使)로 나가 재임중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파주 관아(坡州 官衙)에서 돌아가시니 때는 중종(中宗) 30년 乙未 9월 29일로 향년 76세였다.
왕은 매우 슬퍼하시고 사제문(賜祭文)을 내림과 동시에 예조좌랑 이경장(禮曹佐郎 李敬長)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묘소는 금천, 시흥 백사동 선영 좌록 해좌(衿川, 始興 栢沙洞 先塋 左麓 亥坐)에 있다.
배위 죽산안씨(竹山安氏)는 목사 자성(牧使 子誠)의 따님으로 5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 용검(用儉)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요, 용공(用恭)은 거창현감(曆昌縣監)이요, 용량(用良)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요, 용겸(用謙)은 증좌승지(贈左承旨)요, 용종(用從)은 참봉(參奉)이며, 사위는 참봉 흥양이인수(參奉 興陽李麟壽)와, 부사 고성남규년(府使 固城南虯年)이다.
공의 묘갈명은 숭녕부부총관 박제빈(承寧府副摠管 朴齋弑)이 지었다.
장자 용검(用儉)은 참봉으로 재직중 중종(中宗) 5년 庚午(1510) 2월에 상소(上疏)로써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은 부친의 무고(誣告)를 변명하고, 15년 庚辰(1520)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2자 용공(用恭)은 중종(中宗) 10년경 광주목사(光州牧使)로 계시던 부친의 임소(任所)에 따라가 있던중 나주 모산(羅州 茅山)에 세거하던 생원(生員) 하동정효손(河東鄭孝孫)의 따님과 결혼하고 이로부터 그곳에 살았다.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명종(明宗) 즉위 후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에 보직되었다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전임하였다. 5년 庚戌(1550)에 거창현감(居昌縣監)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12월13일 관아(官衙)에서 돌아가시니 나주 원정리(羅州 元井里), 지금 영암군 신북면 용산리 서당동 임좌(靈岩郡 新北面 龍山里 書堂洞 壬坐)에 반장(返葬)하였다. 효종(孝宗) 7년 丙申(1656) 12월에 공의 묘비를 세웠는데 손자 사교당 준(四矯堂 浚)이 묘표를 지었다. 순조(純祖) 26년 丙戌(1826)에 고을 사림(士林)들이 공의 묘소 아래 사우(祠宇)를 지어 향사 하였으니 이른바 송산사(松山祠)이다. 고종(高宗) 5년 戊辰(1868)에 서원 철폐령(書院 撤廢令)으로 인하여 훼철되었더니 지난 庚寅(1950) 사변후 공의 4자 청계 몽정(淸溪 夢井)의 후손이 세거하는 여천군 율촌면 가장리 평촌(麗川郡 栗村面 佳長里 平村)에 복설(復設), 매년 3월 향사하고 있다.
※朝鮮王朝寶錄, 居昌公 墓表.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