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희정 (柳希汀)

류희정(柳希汀) 영암공(靈巖公) Ryu, Hui-Jeong, 생몰년:1472-1528, 세:17
中宗朝. 武臣. 夏亭公派,

예조참판 맹문(禮曹參判 孟聞)의 증손(曾孫)이요, 고양군수 순행(高陽郡守 順行)의 2자로 성종(成宗)3년 壬辰에 한양(漢陽)에서 태어났다.
연산군(燕山君) 4년 戊午(1498)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傅官)을 거쳐 함평현감(咸平縣監).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중종(中宗) 반정(反正)후 정국원종훈(端國原從勳)에 책록되었다. 그 후 공조좌량(工曹佐郎)을 거쳐 남원판관(商原判官)으로 나갔다가 형조정랑(刑曹正郎)을 지낸 후 영암군수(靈岩郡守)로 나가 20년 乙酉(1525) 4월,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얼마 후 사면(赦免)되어 서천군수(舒川郡守)로 나갔다가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23년 戊子 7월 11일, 경제(京第)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7세로 시흥백사동 선영 서강(始興柏沙洞 先塋 西同)에 안장하였다.
공께서 내외(內外)의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 청렴(淸廉)과 근신(謹愼)으로 일컫었고, 한편 고을을 다스림에 치적(治績)이 훌륭하여 백성들이 부모(父母)같이 따랐었다. 특히 육조(六曹)의 랑직(郎職)은 문관(文官)으로도 선발(選拔)되기 어려운 직책인데 공이 무반(武班)으로서 양조(兩曹)의 랑관(郎官)을 지냈던 것은 당시의 중망(童望)을 가히 알 수 있겠다. 또한 가정에 있어서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친척간에 돈목하여 종당(宗黨)의 모범이 되었었다.
배위 광주안씨(廣州安氏)는 부정 선(副正 璿)의 따님인데 1남 1녀를 두고 일찍 돌아가시니 광주(廣州) 고을 안씨(安氏)의 선산(先山)에 장례를 모셨고, 죽산박씨(竹山朴氏)는 현감 근손(縣監 謹孫)의 따님인데 4남을 두었다. 공께서 질병(疾病)으로 계실 때 박씨부인(朴氏夫人)이 몸소 탕약(湯藥)을 시중하되 주야(晝夜)로 옷을 벗지 않고 울면서 온갖 정성을 다하여 기운을 이미 잃었더니 공께서 돌아가신 후 너무 슬퍼하여 마침내 병을 얻어 동년 9월 5일 돌아가시니 수(壽)가 겨우 42세였고 공의 묘소에 합부(合祔)하였다.
아들은 용충(用忠). 용경(用敬). 생원 용심(生員 用諶). 참봉 용강(參奉 用剛). 용순(用純)이요, 사위는 진사 진주강잠(進士 晋州姜潛)이다.
중종(中宗) 25년 庚寅(1530) 9월에 묘비를 세웠는데 묘갈명(墓碣銘)은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이 지었다. 후에 증손 하담 공량(荷漂 公亮)이 귀히 됨으로 인하여 통예원좌통예(通禮院左通禮)에 추증(追贈)되었다.
3자 용심(用諶)은 일찌기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과 사재 김정국(思齋 金正國)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양공(兩公)은 공의 전부인 진주류씨(晋州柳氏)의 외숙(外叔)이었다. 사재 (思齋)선생께서 공에게 증시(贈詩)하여 이르기를『내 누이의 사위는 참으로 옥윤인데 이름은 용심이요, 자는 이신이며 성은 류씨이다. 이름을 돌아보고 자를 생각하여 날마다 자신을 반성하고 천성을 기르니 독실하고 순후하도다. 나를 쫓아 배움에 서로 발천하니 그 식견과 도량이 다른 사람에 뒤지지 않는도다』
하였으니 그 추허(推許)함을 가히 알겠다.
명종(明宗) 원년 丙午(1546)에 성균생원(成均生員)에 급제하였다. 공은 문장(文章)이 유여하고 해서(?書)에 능하여 부친 영암공(靈岩公)의 묘비를 손수 써서 세웠다.
묘소는 파주군 광탄면 부소암(坡州郡 廣灘面 扶蘇岩)에 계시며 후에 손자 하담 공량(荷漂 公亮)의 귀히 됨으로 인하여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4자 용강(用剛)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기 그지 없어 경전(經傅)의 세밀한 뜻을 모르는 것이 없더니 나이 22세때부터 누차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과운(科運)이 불리하여 낙제하였다. 28세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을 지내고 중년 부터는 관로에 뜻을 끊고 자신을 위하는 학문에 전념, 늙도록 게을리 하지, 않으니 향당(鄕黨)의 사우(士友)들이 경복(敬服)하지 않음이 없었다. 평생에 과묵(寡黙)하여 말을 잘 하지 않았으나 누가 의심나고 어려운 것을 물어오면 즉시 응답하여 해석하여 주고 조금도 스스로 교만한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치가(治家)에 근검(勤儉)으로 법도가 있어 가난하였지만 마음은 항상 편안히 가지 었다.
※朝鮮王朝實錄. 墓碣銘. 甲子譜. 思齋集. 家狀

[입력: ryuj 09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