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희림 (柳希霖)

류희림(柳希霖), 문양군(文陽君), Ryu, Hui-Rim, 생몰년:1520-1601, 세:18
宣祖朝 功臣, 檢漢城公派, 자 경열(景說).

회인현감 형(懷仁縣監 衡)의 현손이요 영평현령 복룡(永平縣令 伏龍)의 2자로 중종(中宗) 15년 庚辰 윤 8월 19일에 광주(廣州)에서 태어났다.
35년 庚子(1540)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명종(明宗) 16년 辛酉(1561)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 전적 (典籍),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다. 선조(宣祖) 3년 庚午(1570) 5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고 5년 壬申(1572)에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전직,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2월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승진하였다.
7년 甲戌(1574) 4월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홍문록(弘文錄)에 등재 되었으며 동년 윤 12월 사헌부집의 (司憲府執義)에 전임되었더니 9년 丙子(1576)에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올랐다.
12년 己卯(1579)에 외직으로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갔다가 만기 후 돌아와 14년 辛巳(1581)에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에 갔었다.
18년 乙酉(1585)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가 동년 8월 구월산(九月山) 대승공(大丞公)묘소를 성소(省掃)하고 오래된 비석(碑石)을 개수(改堅)하였다. 이듬해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참의(戶曹參議) ,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 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쳐 20년 丁亥(1587) 4월에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이조참의(吏普參議)에 제수되었다.
25년 任辰(1592) 4월 왜적(倭賊)이 크게 침입하여 마침내 왕께서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하기에 이르렀는데 당시 공께서 73세의 노령으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등과 함께 어가(柳駕)를 호종(扈從)하였다. 그동안 승정원우승지(承政院右承旨) ,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27년 甲午(1594)에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승진하고 얼마 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34년 辛丑 11월 13일 자택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82세로 광주 오고미 선영 계좌(廣州 吾古未의 先塋 癸坐)에 안장되었다.
배위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언량(彦良)의 따님으로 무후하여 공의 종제 개(從弟 漑)의 2자 명남(命男)을 맞아 계자(系子)하였다. 명남은 음사로 종친부주부(宗親府主簿)를 거쳐 태인현감(泰仁縣監)을 지냈다.
선조(宣祖) 37년 甲辰(1604) 6월에 왜란(倭亂)때 신하들의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있었는데 공에게 호성공신 삼등(扈聖功臣 三等)에 책록됨과 아울러 문양군(文陽君)에 봉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의 증직이 내렸으며, 이듬해 정월에는 사제문(賜祭文)을 내려 예조좌량 윤광계(禮曹佐郞 尹光啓)로 하여금 치제(致祭)토록 하시었다.
광해군(光海君) 5년 癸丑(1613) 4월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의 가증(加贈)과 아울러 부조묘(不祧廟)의 특전이 내리었다.
※朝鮮王朝實錄.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