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희량 (柳希亮)

류희량(柳希亮), 감사공(監司公), Ryu, Hui-Ryang, 생몰년:1575-1628, 세:21.
光海朝 文臣, 中門祇候使公派. 자 용경(龍卿), 호 제교(霽嶠), 봉음(峰陰).

문양부원군 자신(文陽府院君 自新)의 5자로 선조 8년 乙亥 4월 3일에 태어나 36년 癸卯(1603)에 생원(生員)에 급제하였다.
38년 乙巳(1605) 7월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유생(儒生)들과 함께 정인홍(鄭仁弘)의 비행을 상소(上疏)로써 규탄하고 이듬해 정월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퇴계 이황(退溪 李滉) 등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소청(疏請)하였다.
광해군(光海君) 원년 戊申(160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검열(檢閱), 지평(持平), 사인(舍人),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 집의(執義),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8년 丙辰(1616)에 형 희빌과 함께 호당(湖堂)에 선입(選入)되었다. 그 후 동부승지(同副承旨), 형저참의(刑曹參議), 우부승지(右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홍문과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재직중 상소로서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얼마 후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임기를 마치고 예조참판(藝曺參判)에 승진되었다. 癸亥(1623) 3월 반정(反正)이 일어나 파직되어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고 수년 후 조카 효립(孝立)의 역모사건에 연좌되어 교살(絞殺)당하니 때는 인조(仁祖) 6년 戊辰(1628) 정월 23일 향년 54세였다.
공은 청렴 검소하고 지조를 지키어 사물에 구애하지 않았고 사람을 상대함에 극히 안은(安穩)하였으며 비록 지위가 높았으나 집은 매우 가난하였다.
일찍이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에게 말하기를 『우리 가문이 필시 망할 것이다. 사람의 집에 좋은 것이 하나만 있어도 사람의 욕심이 되어 끝내는 자신을 망치는 것인데 하물며 사람의 하고 싶은 바가 하나 둘이 아니고, 또한 난세(亂世)에 왕실(王室)의 척리(戚里)인데서야 어찌 하겠는가?』하였다. 癸亥에 반정이 일어나 귀양을 떠남에 미쳐 또 청음(淸陰)에게 말하기를 『우리 가문의 자제들이 귀하게 생장하여 이제 궁벽한 시골에 유배되니 반드시 그 고초를 견디지 못하고 사특한 마음이 생길 것이다. 우리 가문에 반드시 살아 남을 자 없으리라』하였다.
丙辰에 그 아들 두립(斗立)이 종형 효립(從兄 孝立)의 옷사(獄事)에 연좌되어 복주(伏誅)되고 공도 또한 죽게 되었는데 여러 동료들이 평소에 공의 근신(勤愼)한 처사를 이쉬워 하면서 각기 서신으로 이별을 고하였다. 공이 금부도사(禁府都事)에게 일러 말하기를 『아이들이 멀리 있어 역모(逆謀)하였다하니 나는 사실을 알지 못하겠으나 국가의 법이 있으니 어찌 면하겠는가? 내 일찍이 자호(自號)를 霽嶠라 하였더니 이제 거제(巨濟)에서 죽게되니 전생(前生)에 정한 이치는 가히 도망하지 못하는가보다』하고 각기 답서를 써서 부친 후 조용히 형장(刑場)에 나가 죽였다.
택당 이식(澤堂 李植)은 이르기를 『마땅히 그는 청렴한 척리(戚里)라 이를 것이다』라고 말하고, 미수 허목(眉叟 許穆)은 저서(著書)인 미수기언(眉叟記言)에 이르기를 『이 사람은 본래 어질고 착함으로 일컫었으며 그 부자간에 폐비론(廢妃論)을 배척, 상소로서 논란함이 있었다』하고, 숙종조(肅宗朝)에 정욱선(鄭勗先)은 이르기를 『밤중에 이 상소문(上疏文)을 읽으니 또한 기분이 상쾌함을 깨달았다』라고 하였다.
배위 능성구씨(綾城具氏)는 수의부위 사함(修義副尉 思諴)의 따님으로 1남 3녀를 두었고 묘소는 대월면 석곡리 축좌(大月面 石谷里 丑坐)에 합부로 모셔있다.
아들 두립(斗立)은 자 군수(君壽)인데 선조(宣祖) 34년 辛丑(1601) 생으로 광해군(光海君) 7년 乙卯(1615)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13년 辛酉(16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한림(翰林)을 지내다가 인조(仁祖) 6년 戊辰(1628)에 종형 효립(從兄 孝立)의 역모에 연좌되어 복주(伏誅) 되었다.
따님은 참의 전주이민수(參議 全州李敏樹), 심익(沈 翊), 해주오세헌(海州吳世獻)에게 출가하였다.
그리고 서녀(庶女) 셋을 두어 이정(李朾), 종실의안감 이장길(宗室 義安監 李長吉), 박지승(朴之升)에게 출가하였다.

※朝鮮王朝實錄, 朝野輯要, 丁巳譜, 號譜.

[입력: ryuj 09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