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희서 (柳熙緖)

류희서(柳熙緖), 유성공(儒城公), Ryu, Hui-Seo, 생몰년:1559-1603, 세:20
宣祖朝 文臣, 左相公派, 자 경승(敬承). 호 남록(南麓)

영의정 우복당 전(領議政 愚伏堂 琠)의 장자로 명종(明宗) 14년 己未에 포천 자작리(抱川 自作里)에서 태어났다. 선조(宣祖) 12년 己卯(1579)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19년 丙戊(1586)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였다.
21년 戊子(1588)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고, 25년 壬辰(1592) 11월, 도원수종사관(都元帥從事官)이 되어 왜적(倭賊)을 격퇴하는데 많은 공을 세우고 이듬해 8월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다.
28년 乙未(1595) 2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이어 장령(掌令). 사간원정언(사간원정언).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거쳐, 이듬해 4월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승진하고, 6월 승정원(承政院)으로 전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31년 戊戌(1598) 8월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使)가 되었다. 이듬해 2월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1월에 탄핵을 받고 사직했더니, 12월에 복직(復職),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33년 庚子(1600) 정월 약방부제조(藥房副提調)를 거쳐 36년 癸卯(1603) 4월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승진하여 유성군(濡城君)에 봉해졌다.
동년 8월 22일 화적(火賊)에게 횡사(橫死)하시니 향년 45세였다.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장계(狀啓)를 올려 아뢰기를 <유성군 류희서(濡城君 柳熙緖)가 선영(先塋)에 성묘차 포천(抱川)에 내려와 있던중 화적(火賊) 30여명이 달려들어 칼로 가슴을 찔러 죽이고 달아났다 합니다.>하였다. 왕은 승정원(承政院)에 전지(傳旨)를 내려 이르기를 <류희서(柳熙緖)가 도적들에게 피살(被殺)되었다니 비록 정시(停市)는 할 수 없으나 금일 열려던 경연(慶筵)은 쉬도록 하라.>하시었다.
후에 정난원종훈(靖難原從勳)에 책록되어 의정부좌찬성 겸 양관대제학(議政府左贊成 兼 兩館大提學)에 증직되었다.
배위 남양홍씨(南陽洪氏)는 부제학 인경(副提學 仁慶)의 따님으로 1남 4녀를 두었으며, 묘소는 포천군 일동면 길명리 금주산 남록(抱川郡 一同面 吉明里 錦柱山 南麓)의 선고(先考)묘소 왼쪽 기슭 해좌(亥坐)에 합부(合祔) 하였다.
아들은 일(鈤)이요, 사위는 고흥류 철(高興柳 澈). 평산신 숙(平山中 塾). 감역 안동권복길(監役 安東權復吉). 승지 전주이유성(承旨 全州李惟聖)이다.
일(鈤)은 자 제유(濟孺)요, 호 학동(鶴洞)이니 선조(宣祖) 9년 丙子(1576)생으로 36년 癸卯(1603)에 진사(進士)에 급제한 후 음사(蔭仕)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의금부(義禁府)의 요직을 거쳐 고성군수(高城郡守)로 나갔다. 광해군(光海君) 5년 癸丑(1613)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廢位) 하여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변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9년 丁巳(1617) 8월 사복시첨정(司僕侍僉正)에 제수되어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사직하고 돌아왔다. 인조(仁祖) 15년 丁丑(1637) 8월 2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2세로 금주산 선영(錦柱山 先塋) 선고(先考)묘소 좌록 자좌(左麓 子坐)에 모셔졌다.
후손은 포천군 소홀면 고모리(抱川郡 蘇忽面 古毛里), 가평군 하면 현리(加平郡 下面 縣里), 연천읍(漣川邑)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 朝鮮王朝實錄, 號譜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