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柳俔), 수초당공(遂初堂公) Ryu, Hyeon, 생몰년:1614-1672, 세:23
顯宗朝 文臣. 中門祇候使公派, 자 경보(馨甫). 호 수초당(遂初堂)
석헌 옥(石軒 沃)의 5대손이요, 전옥서봉사 동기(典獄署奉事 東紀)의 장자로 광해군(光海君) 6년 甲寅1 9월 1일에 창평 유곡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품이 뛰어나고 도량이 크더니 독서(讀書)를 즐기고 유희(遊戱)를 좋아하지 않아 마을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지 않았다.
인조(仁祖) 14년 丙子(1636)에 청병(淸兵)이 쳐들어와 조야(朝野)가 온통 시끄럽던차 부친께서 내직으로 한양(漢暘)에 계시므로 공께서 모친을 모시고 동복(同福) 산중으로 피란하여 아우 의(儀)에게 봉양을 부탁하고, 몸소 가정(家丁) 십여인을 거느리고 북상(北上)도중 많은 의병(義兵)을 얻어 남한산성(南漢山域)산에 이르러 화전(和戰)이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별수 없이 의병을 해산하였다. 그리고 시(詩)를 지어 이르기를
『등불아래 글 읽다가 탄식하노니 천지간에 한 장부가 없어서
삼백년 지켜온 국가의 사직을 어찌하여 되놈에게 넘겨주었나.』
하고, 드디어 가정(家丁)들과 함께 부친 봉사공(奉事公)의 거처를 두루 찾다가 창평(晶平)에 이르니 부친께서 이미 돌아와 집에 계시었다. 이에 봉사공(奉事公)께서 공을 칭찬하고, 이르기를 『충효(忠孝)를 겸하여 가문을 일으킬 아들이라. 』하였다.
효종(孝宗) 4년 癸巳(1653)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의 부정자(副正字) , 박사(博士)를 거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과 예조(禮曺) , 병조(兵曹)의 좌랑(佐郎)을 역임한 후 현종(顯宗) 2년 業丑(1661)에 전주판관(全州判官)으로 나갔는데 이곳은 팔로(八路)의 화물(貸物)이 서로 통하는 곳으로 간리(奸吏)의 행패가 심한 곳이었다. 그러나 공께서 청렴과 결백을 스스로 지킴에 곁에서 또한 일호(一毫)라도 그 청덕(淸德)을 흠잡지 못하였다. 체임하고 돌아옴에 그 행장(行裝)이 초라하고 오직 서적(書籍) 몇 권이 있을 따름이었다.
5년 甲辰(1664)에 삼도해운판관(三適海運判官)을 겸하다가 얼마 후 내직으로 들어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 병조정량(兵曹正郎)을 거쳐 이듬해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나갔다. 7년 丙午(1666)에 권간(權奸)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후 금서(琴書)를 스스로 즐기다가 13년 壬子 8월 3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59세였다.
처음 창평 고을 동쪽 운암산(雲巖山)에 장례를 모셨더니 숙종(肅宗) 34년 己丑(1709) 11월 24일에 창평 유곡 종제(昌平 維谷 宗第)옆 해좌(亥坐)에 이폄(移窆)하고 묘지(墓誌)를 묻었는데 묘지는 증손 성화(聖和)가 지었다.
배위 반남박씨(潘南朴氏)는 첨정 동위(僉正東緯)의 따님으로 1남을 두어 세경(世慶)이니 선교랑(宣敎郎)이다.
후손은 창평 유곡리(昌平 維谷里)에 세거하고 있다.
비서원승 류인철(祺書院丞 柳寅哲)이 행장을 짓고, 동지돈녕원사 김용진(同知敦寧院事 金容鎭)이 묘갈명을 지었다.
※ 國朝榜目. 墓誌.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