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효장(柳孝章), 영광공(靈光公), Ryu, Hyo-Jang, 생몰년: ?-?, 세:15
成宗朝 文臣. 檢漢城公派, 자 경숙(慶叔).
회인현감 형(懷仁縣監 衡)의 4자인데 일찌기 문음으로 출사, 찰방(察訪)으로 재직중 예종(睿宗) 원년 己丑(1469)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공조정랑(工曹正郎)을 거쳐 성종(成宗) 7년 丙申(1476) 9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제수되었더니 12년 辛丑(1481)에 영광군수(靈光郡守)로 나갔다.
공께서 돌아가심에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만사(挽詞)를 지어 애도하였으며, 묘소는 김제군 백산면 두모동 자좌(金堤郡 白山面 斗毛洞 子坐)에 모셔 있다.
배위 순흥안씨(順興安氏)는 동돈념 진(同敦寧 進)의 따님으로 3남 5녀를 두었다. 아들 인호(仁濠)는 공조참의(工曹參議)요, 인홍(仁洪)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요, 인유(仁儒)는 첨정(僉正)이며, 사위는 우산군 전주이종(牛山君 全州李踵) , 상장 이양손(上將 李良孫) , 승지 진주정성근(承旨 晋州鄭誠謹). 참판 연안김봉(參判 延安金崶) , 진주정복린(晋州鄭福麟)이다.
장자 인호(仁濠)는 자 언순(彦淳)이니 세종(世宗) 29년 丁卯(1447)생으로 예종(睿宗) 원년 己丑(1469)에 진사에 급제하고, 효력부위(效力副尉)로 재직중 성종(成宗) 7년 丙申(1476)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 좌랑(佐郎) , 예조정랑(禮曹正郎) ,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 사간원사간 (司諫院司諫) , 공조참의(工曹參議)등을 역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중종(中宗) 17년 壬午(1522)에 졸하니 향년 76세로 광주 오고미(廣州 吾古未) 현재 서울 강동구 송파동 갑좌(江東區 松坡洞 甲坐)에 배위 거창신씨(居昌愼氏)와 합부(合祔)로 모셔졌다.
2자 인홍(仁洪)은 자 언용(彦容) 호 죽계(竹溪)인데 세조(世祖) 2년 丙子(1456) 6월 1일에 한성 남부 순청동(漢城 南部 巡廳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언어가 간결하고 행동이 무게가 있었으며, 기질(氣質)이 영특하여 겨우 10여세에 경사(經吏)에 능통하니 보는 사람마다 큰 인물이 될것으로 기대하였다. 16세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문하에 수업 학문이 날로 성취되니 선생께서 애중하여 항상 칭찬하기를 『우리 유문(儒門)에 사람이 있다』하였다. 성종(成宗) 12년 辛丑(1481)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재직중 18년 丁未(1487) 12월에 주상(主上)께서 선정전(宣政殿)에 납시어 경서(經書)를 강론하시면서 당시 문신(文臣) 5인을 선발하였는데 공이 그중에 참강(參講)하여 서전 우공장(書博 禹貢章)을 통독하였다. 24년 癸丑(1493) 3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고 이어 초계군수(草溪郡守)로 나갔는데 얼마후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여 정사가 혼란하고 간신배(奸臣輩)들이 발호(跋扈)하자 상소로써 누차 남곤(南衰) , 심정(沈貞)등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으니 벼슬을 버리고 고향 황산(黃山)으로 돌아와 그 후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누차 부름을 받고도 나가지 않았다. 4년 戊午(1498)에 사화(士禍)가 일어나 많은 사류(士類)들이 극심한 화를 입었으나 공은 초연히 면하니 사람들이 곽임종(郭林宗)의 고사(故事)에 비유하였다. 공께서 비록 시골에 자취를 감추었으나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남달라 시를 읊는 가운데도 자주 그 울분이 나타났고, 혹 한가히 있을 때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었다. 만년에는 후진들을 가르침으로 업을 삼으니 생도들이 날로 모여 수업을 청하는 자 많았었다. 중종(中宗) 14년 己卯(1519) 정월 13일에 졸하니 향년 64세로 김제군 백산면 두모동 선영 계하 자좌(金堤郡 白山面 斗毛洞 先塋 階下 子坐)에 모시었다. 사림(士林)들이 공의 학문과 행의를 추모하여 전주 황강서원(黃岡書院)에 배향(配享)하였다.
3자 인유(仁濡)는 일찍 가정교훈을 독실히 익혀 문장(文章)이 심오하고 학문이 해박하더니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바로 성종(成宗) 8년 丁酉(1477)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거쳐 장예원사평(掌隸院司評) ,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 첨정(僉正)등을 역임하였다.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하여 정사가 날로 어지럽자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로 돌아와 시부(詩賦)를 즐기다가 돌아가시니 고부군 장순면 도장동 병좌(古阜郡 長順面 道莊洞 丙坐)에 모셔졌다.
공의 4부자가 모두 대과(大科)에 급제하니 당시에『一門四科집』으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朝鮮王朝實錄, 國朝榜目, 行狀.
[입력: ryuj 0909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