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효중(柳孝中), 창평공(昌平公), Ryu, Hyo-Joong, 생몰년:1421-1504, 세:15
成宗朝 蔭仕. 檢漢城公派, 자 정숙(正叔)
회인현감 형(懷仁縣監 衡)의 3자로 세종(世宗) 3년 辛丑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일찌기 사마시(司馬試 :生員 , 進土)에 급제하였다.
음사로 세자익위사부솔(世子翊衛司副率) , 평시서령(平市署令) , 찰방(察訪)을 거쳐 삼화(三和) , 창평(昌平) 두 고을의 현령(縣令)을 지냈는데 청렴과 검약으로 백성을 다스려 이르는 곳마다 칭송이 자자하였다.
나이 60이 넘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형제와 더불어 우애하며, 지팡이를 짚고 내왕 하면서 바둑과 시서(詩書)로 여생을 마쳤다.
연산군(燕山君) 10년 甲子에 돌아가시니 향년 84세로 김제군 공덕면 황산리 와룡강 사좌(金堤郡 孔德面 黃山里 臥龍崗 巳坐)에 안장되었다.
배위 수원김씨(水原金氏)는 부사 귀성(府使 貴誠)의 따님으로 무육(無育)하고,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부호군 경신(副護軍 景愼)의 따님으로 3남 2녀를 두었으니 인수(仁洙) , 인사(仁泗) , 인분(仁汾)과 광산 김탁원(光山 金卓元) , 조천부정 이이손(助川副正 李利孫)은 그 아들과 사위이다.
장자 인수(仁沫)는 연산군(燕山君) 원년 乙卯(1495)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중종(中宗) 8년 癸酉(1513)에 식년 문과(式年 文科)에 급제하여 21년 丙戌(1526)에 예조(禮曹) , 형조정랑(刑曹正郎) , 안변부사 (安邊府使)를 지낸후 사섬시정(司贍寺正)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묘소는 지금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선영 서록 임좌 합폄(楊平郡 楊西面 木旺里 先塋 西麓 壬坐 合窆)으로 묘비가 있는데 비문은 당시 예조판서 성세창(禮曹判書 成世昌)이짓고, 승문원박사 이택(承文院博士 李澤)이 썼다.
2자 인사(仁泗)는 기골(氣骨)이 장대하고 성품이 호협하여 장수의 재질이 있더니 나이 20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강동현령(江東縣令) , 임치첨사(臨淄僉使)를 지낸 후 질병으로 인하여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포부를 펴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시니 고부군 장순면 서당동 사좌(古阜郡 長順面 書堂洞 巳坐)의 언덕에 장례를 모시었다.
3자 인분(仁汾)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가정교훈을 독실히 익히는 한편 경학(經學)을 깊이 탐구하고, 일찍 참봉(參奉)의 제수가 있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중종(中宗) 10년 乙亥(1515) 봄에 중전(中殿)이 궐위(闕位)되어 왕비(王妃) 간택이 있었는데 이때 공의 따님이 그 물망에 올랐다가 그만둔 일이 있었다. 31년 丙申(1536)에 돌아가시니 황산 와룡강 사좌(黃山 臥龍江 巳坐)에 모시었다.
※墓碣銘, 朝鮮王朝實錄.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