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효용 (柳孝庸)

류효용(柳孝庸), 함안공(咸安公), Ryu, Hyo-Yong, 생몰년:1419-1477, 세:15
世祖朝 武臣. 檢漢城公派, 자 자상(子常)

회인현감 형(懷仁縣監 衛)의 2자로 세종(世宗) 원년 己亥에 태어나 29년 丁卯(1447)에 무과(武科)에 급제 하였다.
세조(世祖)원년 乙亥(1455) 12월에 호군(護軍)으로 재임중 좌익원종훈(佐翼原從勳)에 책록되고 그 후 고부군수(古阜郡守)를 거쳐 함안군수(咸安郡守)를 지냈는데 청렴과 위엄으로 정사를 행하여 오로지 백성들의 복지(福祉)를 생각하고 농사를 권장하여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향학(鄕學)을 진흥시켜 교화(敎化)에 힘씀으로써 퇴임 후 고을에서 선정비(善政碑)를 세워 칭송하였다.
만년에 고향 황산(黃山)으로 돌아와 시서(詩書)를 즐기다가 성종(成宗) 8년 丁酉에 돌아가시니 향년 59세였다.
묘소는 김제군 공덕면 황산리 석현산 분토동 임좌(金堤郡 孔德面 黃山里 石峴山 粉土洞 壬坐)에 모시었다.
배위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자번(子藩)의 따님이요, 인천이씨(仁川李氏)는 중추부사 효상(中德府事 孝常)의 따님이다.
3남 1녀를 두었으니 인의(仁?)와 종사랑 인위(從仕郞 仁渭)와 참봉 인식(參奉 仁湜)과 첨추 평강채자연(僉樞 平康蔡自涓)은 그 아들과 사위이다. 공의 행장(行狀)은 단운 민병승(丹雲 閔丙承)이 지었다.
2자 인위(仁渭)는 성품이 공손하고 온후하며 풍채가 준수하더니 어버이에 효성이 극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독실하였다. 일찍 가정 교훈을 익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아우 인식(仁湜)과 더불어 경사(經史)를 탐구하는 반면 의례(儀禮)를 준용하는데 힘쓰니 원근의 선비들이 많이 와서 물었다. 음보(蔭補)로 종사량(從仕郎)이며 묘소는 김제군 공덕면 존걸리 문정동 손좌(金堤郡 孔德面 存傑里 文正洞 巽坐)에 모셔있다.
3자 인식(仁湜)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관후(?厚)하여 공손하고 침착함이 마치 성인(成人)과 같더니 일찌기 중형 인위(仲只 仁渭)와 함께 경전(經傅)은 물론 제가서(諸家書)에 이르기까지 정밀히 강독(講讀)하여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재행(才行)으로 천거되어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더니 임기(任期)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서사(書史)를 스스로 즐기며 더욱 근사록(近思錄)에 정력을 기우렸다. 한편 자기의 학문과 고인(古人)의 가언선행(嘉言善行)을 절충하여 행의(行誼)에 힘쓰다가 돌아가시니 분토동 선영 임좌(粉土洞 先塋 壬坐)에 안장되었다.
공의 묘소위에 공의 증조 문화군(曾祖 文化君)과 조 검한성공(祖 檢漢城公)의 단소(壇所)가 모셔져있다.
戊辰(1988) 6월에 공의 묘역을 정화하고 아울러 제반 석의(石儀)를 갖추었다. 공의 후손은 주로 김제(金堤) , 완주(完州) , 익산(益山) , 전주(全州) , 정읍(井邑)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 行狀

[입력: ryuj 09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