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형 (柳衡), 회인공(懷仁公), Ryu, Hyung, 생몰년:1387-1454, 세:14
世宗朝 蔭仕, 檢漢城公派, 자 숙평(叔平) , 호 무민옹(无憫翁).
검한성사 원현(檢漢城事 元顯)의 6남으로 고려 우왕(禑王) 13년 丁卯생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더니 조선 태종(朝鮮 太宗) 5년 乙酉(1405)에 생원(生員)에 급제하니 당시19세였다.
문음(門蔭)으로 발탁되어 주부(主簿)를 거쳐 장수(長水)와 회인(懷仁)고을 현감(縣監)을 지낸 후 벼슬에 뜻을 끊고 전주 이성(全州 利城), 지금 김제 황산(金堤 黃山)으로 돌아와 시서(詩書)를 스스로 즐기고 시를 지어 이르기를,『산가는 적막하여 복희씨의 세상이요, 만권을 장서하여 한가히 늙는도다』<山家寂寞羲 皇世 萬卷藏書老我閑>
단종(端宗) 2년 甲戌 11월 丙子일에 향년 68세로 돌아가시니 이듬해 8월 庚午일에 양근 목율동(楊根 木栗洞), 지금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楊平郡 湯西面 木旺里) 후록(後麓) 임좌(壬坐)에 장례를 모시었다.
배위 인천채씨(仁川蔡氏)는 현감 이(縣監 怡)의 따님으로 태조(太祖) 7년 戊寅(1398)에 태어나 세조(世祖) 12년 丙戌(1466) 8월 임자일(壬子日)에 향년 69세로 돌아가시니 동년 10월 경신일(庚申日)에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하였다.
4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효량(孝良)은 사정(司正)이요, 효용(孝庸)은 함안군수(咸安郡守)요, 효중(孝中)은 창평현령(昌平縣令)이요, 효장(孝章)은 영광군수(靈光郡守)이며, 사위는 직장 전주최안례(直長 全州崔安禮) 이다.
양평 목왕동(楊平 木旺洞) 공의 묘소에 당시 세운비석이 마모되어 丙寅(1986) 5월에 후손들의 성력(誠力)으로 구비(舊碑)결에 새로 묘비(墓碑)를 세우고 제반 석의 (石儀)를 갖추었다.
묘갈명(墓碣銘)은 월성정동취(月城鄭東暉)가 짓고, 글씨는 후손 재호(後孫 在浩)가 전면을, 방손응열(傍孫 應烈)이 후면을 썼다.
※舊碑文 嘉靖譜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