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철(柳寅哲), 승지공(承旨公), Ryu, In-Cheol, 생몰년:1854-1937, 세:31
高宗朝 文臣. 左相公派, 자 인서 (仁瑞). 호 금당(錦塘).
문성군 수(文城君 洙)의 3자 서흥부사 계손(瑞興府使 秊孫)의 I5대손이요, 강진현감 몽호(康津縣監夢虎)의 11대손이요, 효자 건영(建永)의 장자로 철종(哲宗) 5년 甲寅 2월 9일 연기군 서면 성재리(燕岐訓 西面 性齋里)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뛰어나고 성품이 영특하여 5세부터 파산 홍인섭(把山 洪寅燮)의 문하에 수업하였는데 과정(謂程) 독촉하지 않아도 스스로학업에 열중하여 문예(文藝)가 날로 진취하였다.
18세 되던 고종(高宗) 8년 辛未(1871)에 모친을 여의고 어린 아우들을 보살피며 홀로 계신 부친을 봉양하는데 혼신(渾身)의 정력을 다하였다.
모친상을 마치고 당시 석학(碩學)인 고산 임헌회(鼓山 任憲晦)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는 한편 과업(科業)을 익혀 육체(六體)에 능함으로 선생께서 원대한 인물로 칭탄하여 마지 않았다.
고종(高宗) 27년 庚寅(189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이듬해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어 부정자(副正宇)를 거쳐 기주관(記注官)에 전직하였더니 34년 T酉(1897)에 부친상을 당하여 애척(哀慽)한 나머지 몸이 쇠약하기에 이르렀고 복제(服制)를 마친 후에도 기일(忌日)을 만나면 슬퍼함이 초종(帝終)때와 같았다.
37년 庚子(1900) 8월 비서원랑(秘書院郎)에 제수되고 얼마후 흥문관(弘文館)에 선입, 시독관(侍讀官)에 임명되었다.
명성왕후(明成壬后)의 기신대제(忌辰大祭)에 대축(大祝)을 행하고 이듬해 辛丑(1901)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수정(修표)의 책임을 맡아 6개월만에 일을 마쳐 사책(史冊)을 봉진(奉進)하니 주상께서 칭선(稱善)하시고 포상(褒賞)이 더욱 중하였다.
39년 壬責(1902) 3월 무주 적상산성 사고(茂朱 赤裳山域 史庫)의 넘검을 특명받고 종정원주사(宗正院主事)를 겸임하여 산성에 도착 즉시 서계(書啓)로서『신(臣)이 선원각 석실(璿源闇 石室)에 비장(祺藏)된 사책(史冊)을 살펴보니 양각(兩閣)에 위로 물이 새고 아래로는 습기가 있어 루헌(樓軒)이 썩고 판목(板木)이 퇴락하여 손을 대면 부서질 것이오니 이동이 어려울것 같읍니다. 어찌 하오리까?』하고 사실대로 아뢰었다.
주상께서 이르시기를 『양각이 이같은지 이미 오래되었다면 전임 사관(前任 史官)들은 어찌 일언(-言)도 없었는가?』하시고, 무주군수(茂朱郡守)와 함께 모든 역사(役事)를 감동(監董)하여 수리토록 하시고 돈 10만량(+萬兩)을 하송(下送)하시었다. 이로부터 10개월만에 역사를 마치고 돌아와 복명(復命)하기를 『역사에 4만량을 쓰고 나머지는 무주군수에게 맡겨 두었읍니다.』고 하니 주상께서 희색이 만면하시어 가상(嘉尙)하다 하시고 또한 심상공순택(沈相公舜澤)과 조상공병세(趙相公秉世)는 공의 충근(忠勤)함과 청렴(淸廉)함을 들어 서로 청백리(淸白吏)라고 칭찬하였다.
동년 11월 비서원랑(祜書院郞)에 다시 임명되고 이듬해 3월 황태자(皇太子)께서 탄신(誕辰)하여 하례를 받을때 선전관(宣箋官)으로써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여 비서원승 겸장례원장례(祺書院丞 兼掌禮院掌禮)에 제수되었다. 이로부터 왕명의 출납(出納)에 충성을 다하여 봉직하다가 세도(世道)가 날로 변하고 국기(國紀)가 날로 핍박한지라 마침내 관직을 사임 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날마다 아우들로 더불어 함께 지내면서 더욱 우애에 독실하며 일간정(一艮亭)이란 정자를 지어놓고 혹은 사우(士左)들을 맞아 시부(諸賦)를 읊으며 국운(國運)의 비참함을 통탄하여 마지 않았다. 한편후진(後進)을 양성하여 국운을 만회하고자 순종(純宗) 2년 戊申(1908)에 서면 고복리(西面 高福里)에 동광학교(東光學校)를 설립하여 직접 교장으로 부임하고 측량과(測量科)등을 두는 한편 배달권학가(培達勸學歌)를 작사 작곡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또한 집에 서당을 설치하여 인근은 물론 멀리서 까지 와서 배우는 자 헤아릴 수 없었으며 학자들과 애국지사의 왕래가 그칠 날이 없었다.
순종(純宗) 4년 庚戌(1910) 가을에 조정에 있던 옛 동료가 서한(書輪)으로 가자(加資)를 권하거늘 공이 사양하고 이르기를 『금세(今世)에 통정(通政)도 이미 극히 천하게 되었는데 가선(嘉善)이면 무슨 영귀(榮貴)가 되겠는가?』하고 끝내 듣지 않았다.
특히 승지 심구택(承旨 沈九澤)으로 더불어 정계(情契)가 매우 두터워 일찍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고 동유록(東遊錄) 일권을 지었으며 또한 유고(遺稿)가 있어 집에 소장되어 있다.
癸亥(1923) 5월에 진천(鎭川)에서 우리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를 편수하였는데 공께서 도유사(都有司)로서 전국의 종친을 수합 4년만에 丙寅(1926) 3월 완간을 보게 되니 이른바 『丙寅譜』 60권이다. 그리고 5년이 지나 辛未(1931) 여름에 옥천(沃川)에서 문화류씨추선록(文化柳氏追先錄)을 간행하였는데 역시 도유사로서 족제 봉양 인호(鳳楊 寅鎬)와 함께 선세의 사적(事蹟)을 천양(關楊)하는데 정력을 다 바쳤다.
丁丑 11월 30일 향년 84세로 졸하니 연기군 서면 용암리 유좌(燕皓郡 西面 龍岩里 酉坐)에 안장되었다. 전규장각직각 청송심주택(前奎章闇直闇 靑松沈周澤)이 공의 행장을 지었다.
배위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용의(用義)의 따님인데 어진 덕이 있어 구고(舅姑)를 효성으로 받들고 부군(夫君)을 공경으로 섬겨 향리에서 여사(女士)로 일컫었고 묘소는 합폄하였다.
2남 1녀를 두어 성렬(星烈) , 경렬(景烈)과 파평윤상영(坡平尹相潁)은 그 아들과 사위이며, 자손이 연기군 서면 성재리(燕岐郡 西面 性齋里)에 세거하고있다.
※ 朝鮮王朝賞錄, 國朝榜目, 行狀.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