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길(柳寅吉), 규오공(葵塢公), Ryu, In-Gil, 생몰년:1554-?, 세:20
光海朝 文臣, 檢漢城公派, 자 경휴(景休), 호 규오(葵塢)
회인현감 형(懷仁縣監 衡)의 장자 사정 효량(司正 孝良)의 5대손이요, 참봉 언(參奉 漹)의 장자로 명종(明宗) 9년 甲寅에 태어났다.
천품이 맑고 고상하며 도량이 커서 어려서부터 재상(宰相)의 인품(人品)이라 하였고 장성함에 학문에 힘써 문장(文章)이 기운차고 간결하므로 당인(唐人)의 풍치가 있다고 일컬었다.
선조(宣祖) 18년 乙酉(1585)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22년 己丑(1589)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다. 24년 辛卯(1591) 4월에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승진하였다.
30년 丁酉(1597)에 종사관(從事官)으로 북방(北方)에 가서 바로 평안도어사(平安道御史)가 되어 백성들의 생활 형편을 잘 살펴 적의하게 처리하니 그 명망(名望)이 높았었다. 당시에 안변부사 농포 정문부(安邊府使 農圃 鄭文孚)와 지기(志氣)가 상합(相合)하여 시(詩)를 서로 창수(唱酬)하기도 하였다.
동년 12월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고 이어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 장령(掌令)을 지내었다.
32년 己亥(1599) 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갔다가 사명(使命)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기행 시문(紀行 詩文)이 많이 세상에 전한다.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거쳐 8월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12월에 사간(司諫)에 제수되고, 이듬해 庚子에 의인왕후(懿仁王后) 상(喪)에 특명(特命)으로 공께서 만사(挽辭)를 제진(製進)하였다. 이어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좌승지(左承旨). 예조참의(禮曹參議)를 두루 거쳐 34년 辛丑(1601) 3월 외직(外職)으로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갔다. 36년 癸卯(1603) 3월 강원도어사 조 탁(江原道御史 曺 倬)의 서계(書啓)에 이르기를 <춘천부사 신 보(春川府使 申 葆)와 강릉부사 류인길(江陵府使 柳寅吉)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있습니다.>하였다.
이듬해 9월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더니 38년 己巳(1605) 정월, 좌승지(左承旨)로 전직되었다가 동년 12월에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
40년 丁未(1607) 8월 내직으로 들어와 오위장(五衛將)을 거쳐 9월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전직되었다.
광해군(光海君) 원년 己酉(1609) 5월,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되고, 이듬해 12월 참지(參知)에, 3년 辛亥(1611) 6월에 다시 참의(參議)에 옮겼더니 이듬해 2월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승진하였다.
5년 癸丑(1613) 2월,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4월, 사헌부대사헌(사헌부대사헌)에 전직되고, 11월에 향난공신(享難功臣)에 책록됨과 아울러 문천군()에 봉해지고 이어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제수 되었다. 7년 乙卯(1615) 4월 대사성(大司成). 7월 대사간(大司諫)에 옮기고, 이로부터 계속 삼사(三司)의 장(長)을 역임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났다.
공께서 돌아가신 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배위 진양강씨(晉陽姜氏)는 부사 준(府使 濬)의 따님으로 자녀를 두지 못하여 공의 아우 의길(宜吉)의 아들 석기(碩基)를 맞아 계자(系子)하였다. 석기(碩基)는 음사(蔭仕)로 보안도찰방(保安道察訪)을 지내었다.
공의 묘소가 본래 청주 민박동 선영 국내 간좌(淸州 民朴洞 先塋 局內 艮坐)에 있었으나 실전(失傳)하였다.
유저(遺著) ‘??詩集’ 1권이 전하여 壬子(1912) 봄에 간행(刊行)되었는데 서문(序文)은 팔계정면규(八溪鄭冕圭)와 수양정언교(首陽鄭言敎)가 짓고, 발문(跋文)은 수양정규석(首陽鄭圭錫)과 전의이교우(全義李敎宇)가 지었다.
후손은 진양군 대평면 당촌리(晉陽郡 大坪面 堂村里)에 세거하고 있다.
※ 朝鮮王朝實錄, 號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