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휘(柳寅徽), 무산공(茂山公), Ryu, In-Hui, 생몰년:1808-1877, 세:31.
高宗朝 武臣, 忠景公派, 초명 석(奭), 자 명서(明瑞).
전사령 좌(典祠令 佐)의 16대손이요, 영암군수 극양(靈巖郡守 克讓)의 11대손이요, 기성(基成)의 장자로 순조(純祖) 8년 戊辰 10월 16일 은진 신암(恩津 莘巖) 지금 논산군 가야곡면 삼전리(論山郡 可也谷面 蔘田里)에서 태어났다.
태어난지 겨우 두달만에 모친 송씨(宋氏)를 여의고, 3세에 계모 김씨(金氏)가 또 돌아가시니 계모 조씨(趙氏)의 양육(養育)에gadlqdj 자라났다.
장성함에 풍채가 훌륭하고 성품이 순근하며 효우(孝友)를 천성으로 타고나 어버이를 섬김에 뜻을 순종하고 아우들로 더불어 우애가 지극하엿다. 한편 가정 교훈을 독실히 익히고 더욱이 병서(兵書)를 좋아하더니 헌종(憲宗) 12년 丙午(1846) 3월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내금위(內禁衛)에 배속되었다가 15년 己酉(1849) 10월 호분위후부장(虎賁衛後部將)에 옮기더니 11월에 계모의 상을 당하여 망극한 슬픔을 다하고 송종(送終)의 절차를 유감없이 행하였다.
복제를 마치자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더니 철종(哲宗) 7년 丙辰(1856) 7월, 부친상을 당하여 한결 전상(前喪)과 같이 행하였다.
9년 戊午(1858) 12월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에 제수되고 이듬해 3월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府都事)에 승진하고, 12월에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에 전직하였다. 11년 庚申(1860) 2월 좌포도청종사관(左捕盜廳從事官)에 제수되었더니 얼마 안되어 충무위중부장(忠武衛中部將)에 옮기고, 이듬해 10월 흥덕현감(興德縣監)으로 나가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잠깐 쉬었다.
고종(高宗) 2년 乙丑(1865) 6월에 공충도병마우후(公忠道兵馬虞後)에 제수되었다가 다음달에 다시 흥덕현감(興德縣監)으로 부임하여 선정(善政)을 베푸니 이듬해 6월 관찰사(觀察使)의 포계(褒啓)로 말미아마 주상께서 특지를 내려 공에게 통정(通政)을 가자(加資)하시었다. 얼마후 무산도호부사(茂山都護府使)에 옮겼다가 이듬해 2월 부령도호부사(富寧都護府使)에 교체되고 얼마 안되어 사직(辭職)하였으니 이상은 공의 관력(官歷)이다. 공께서 관직에 있기 30년에 관리들은 두려워 하고 백성들은 홈모하여 칭송하는 소리가 길에 넘치었다.
14년 丁丑 정월 4일 향년 70세로 졸하니 살던 곳 신암 안산 손좌(莘巖 案山 巽坐) 언덕에 안장되었다.
배위 연안이씨(延安李氏)는 도훈(度勳)의 따님이요 충주박씨(忠州朴氏)는 기영(基永)의 따님인데 모두 숙부인(淑夫人)에 가자(加資)되고 또한 건위(乾位) 묘소에 합부하였다.
공의 묘표는 문화류씨대종회장 근영(文化柳氏大宗會長 根榮)이 짓고 증손 길선(曾孫 吉善)이 비문을 썼다.
2남 1녀를 두어 아들 창렬(昌烈)은 철산부사(鐵山府使)요, 상렬(相烈)은 학부교관(學部敎官)이며 사위는 평양 조희완(平壤 趙羲完)읋 흥해군수(興海郡守)를 지내었다.
장자 창렬(昌烈)은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더니 고종(高宗)초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개천군수(介 川 郡守), 철산부사(鐵山府使), 공주영장(公州營將)등을 지냈다.
차자 상렬(相烈)이 역시 효우가 지극하고 문학이 유여하더니 고종(高宗) 말엽에 승훈랑(承訓郞 )으로 학부교관(學部敎官)을 지내다가 乙巳조약이 체결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배일척사(排日斥邪)의 일념으로 후진 교육에 여생을 마쳤다.
자손이 논산군 가야곡면 삼전리(論山郡 可也谷面 蔘田里)에 세거하고 있다.
※高宗實錄, 墓表.
[입력: ryuj 09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