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협 (柳寅協)

류인협(柳寅協), 병사공(兵使公), Ryu, In-Hyeop, 생몰년:1812-1873, 세:31
高宗朝 武臣. 忠景公派>

영암군수 극양(靈巖郡守 克讓)의 후예로 기성 (基成)의 2자인데, 출계하여 송암 관(松庵 灌)의 후예인 통어사 문식(統禦使 文植)의 증손이요, 증호조참판 굉(贈戶曹參判 淃)의 손이요, 군수 기항(郡守 基恒)의 계자(系子)가 되었다.
순조(純祖) 12년 壬申 9월 13일 연산 삼전리(連山 蔘田里)에서 태어나 장성한 후 장단(長湍)에 세거하는 통어사댁(統禦使宅)으로 출계하였다.
34년 甲午(1834)에 무과(武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고종(高宗) 원년 甲子(1864)에 파주목사(坡州牧使)로 재임중 치적(治鑛)이 드러나 표리(表裏)의 하사(下賜)가 있었다.
이듬해 순천부사(順天府使)로 전직하여 만기(滿期)후 승지(承旨)에 발탁, 강연(講筵)에 입시(入侍)하여 『제왕(帝王)의 성덕(盛德)은 간언(諫言)을 쫒는 것으로 우선해야 하며, 구소(鳩巢)를 멀리 물리치려면 완물상지(玩物喪志)를 해선 안됩니다.』하고 간하니 주상께서 크게 칭선(稱善)하시 었다.
7년 庚午(1870) 10월 전라병사(全羅兵使)에 제수되어 선치(善治)를 행하니 전라관찰사 이호준(全羅觀察使 考鎬俊)의 장계(狀啓)로 말미암아 의정부(識政府)에서 계주(啓奏), 9년 壬申(1872) 8월 19일 연임(連任)의 특명이 있었다.
10년 癸酉(1873) 7월 10일 좌의정 강 노(左義政 姜 㳣)가 차대(次對)에 이르기를 『전라병사 류인협(全羅兵使 柳寅協)은 많은 공적이 드러났으니 특히한 품계를 가자(加資)하면 어떨는지요.』하니 주상께서 윤허(允許)하시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특승(特陞)되었다.
동년 7월 23일 돌아가시니 향년 62세로 고향 논산군 가야곡면 삼전리 옥녀봉 마항 정좌(論山郡 加也谷面 蔘田里 玉女峰 馬項 丁坐)에 모셔졌다.
배위 함평이씨(咸平李氏)는 진사 기서(進士 基緖)의 따님으로 3남 1녀를 두고 졸하니 장단군 군내면 정자리 와둔지(長渫郡 郡內面 亭子里 瓦屯地) 총관공(摠管公) 묘소 계하 을좌(階下 乙坐)에 모시었다.
장남 동렬(東烈)은 무과(武科)로 죽산부사(竹山府使)를 지내고, 2남 장렬(漳烈)은 무과(武科)로 현감(縣監)을 지냈는데 청렴(淸廉)한 정사를 베풀고, 문필(文筆)로 명성이 있었으며, 퇴임후 고향에서 향약(鄕約)을 실시, 예절을 권장하니 온 고을이 감화하였고, 3남 풍렬(灃烈)은 무과(武科)로 여러 고을수령(守令)을 지냈는데 선치(善治)로 명망이 있었으며, 1녀는 군수 청송심흥택 (郡守 靑松淪興澤)에게 출가하였다.
자손이 양주군 와부면 월문리(楊州郡 瓦阜該 月文里)에 살고 있다.

貞愼公 祀壇碑銘序

儒州世阡은 鴻溝북쪽 數里길인데 奉審과 香火가 끊긴지 어언 六十餘年이라 오늘도 長湍의 맑은 샘은 임진강에 흐르고 飛鳥는 休戰線을 자유로이 넘나들건마는 幽宅의 安危조차 물을 곳 없어 마음 쓰라리고 등골에 땀이 솟구친다. 어찌 報本의 情을 國運의 顯晦와 같이 하리오 후손이 정성을 모아 金堤 黃山世阡에 公의 壇所를 封築하고 香火를 올리니 山川이 增輝하고 日月이 光明하도다 壇아래 엎드려 公의 行蹟을 살피면
府君의 諱는 陞이요 字는 希元 貫은 文化로 始祖 高麗統合三韓翊贊壁上功臣 大丞公 諱 車達의 十世孫이시다 高麗高宗三十五年戊申(一二四八)에 태어나시니 曾祖는 政堂文學參知政事禮部尙書諡文簡公 諱 公權이요 祖는 僕射로 翰林學士 諱澤이시고 考는 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 諡 文正 諱 璥이요 妣는 平壤郡夫人 丹陽張氏이시니 中禁指諭郞將 世儀의 女이시다
高麗元宗三年壬戌(一二六二)에 門蔭으로 刪正都監判官에 補職되고 同十年己巳에 行首로 拔擢되였다가 얼마 후 權奸들의 謀陷으로 父親과 같이 海島로 流配되었다가 바로 풀려나 郎將 및 軍器監과 工部와 戶部侍郞이 되시고 知閤門事등을 歷任하였으며 元나라에서 日本을 征伐할 때 接伴使로 갔다가 돌아와 廣州牧使를 지냈다 同十五년甲戌에 內職으로 돌아와 殿中尹判將作監에 昇進되고 知通禮門事를 兼任하셨다. 그로부터 十四年동안 通禮門에 在職하실 때 당시 朝廷에 禮文이 散失된것을 公께서 新儀를 撰述하시니 그 博禮하고 仔詳함에 感服하여 모두 이를 좇아 행하였다 忠烈王十三年丁亥(一二八七)에 左副承旨에 除授되어 王命의 出納에 勤實하므로 王의 稱讚과 信任이 두터웠다 同十七年辛卯(一二九一)九月 密直司事로 江華島에 머물면서 受亂地域의 租稅를 減免해주고 이어 版圖判書同知事와 世子元賓과 監察大夫都僉議司事등을 두루 歷任했는데 在職期間에 秋毫의 犯法이 없었으므로 朝野에서 모두 그治積을 稱頌하고 王으로부터 兩臺銀印一介를 下賜받았다 同二十年甲午(一二九四年)七月에 同知密直司事로 在職중 直史官權漢功과 함께 元나라에 聖節使로 다녀오시고 이듬 해 正月에 知密直司事에 除授되고 이어 都僉議參理에 昇進하였다가 致仕하였으니 以上은 공의 三十六年간의 履歷이다 公은 容貌와 行動이 바르고 氣質이 聰明하여 일찍이 家庭敎訓을 篤實히 익힘에 文正公께서 매우 사랑하셨다 어려서부터 孝誠이 至極하여 旌閭의 恩典이 내렸다 官職에 있을 때도 疾病이 아니면 반드시 자기의 居處를 옮기지 않았으며 일을 처리함 에 더욱 緻密하고 仔詳하였으며 酒色과 財利에 淡淡하였다 公은 武術에도 능하시니 특히 활을 잘 쏘아 百發百中의 名弓이었다 충렬왕 二十四年(一二九八)戊戌여름에 藏經會에 나갔다가 病을 얻어 同年五月二十七日卒하시니 享年이 五十一歲였다 文集을 세상에 頒布하시니 東方의 大賢으로 世人의 稱頌이 높았다 忠烈王이 訃音을 듣고 슬퍼하사 賻儀를 厚히 내리고 朝會를 파함과 동시에 貞愼의 諡號를 내리고 同年七月十八日百官이 會葬한가운데 牛峰山西麓에 葬禮를 모시었다 配位는 南陽洪氏兵部尙書 縉의 따님으로 四男三女를 두고 公보다 먼저 돌아가시다 後配安氏는 左右衛保勝別將 珪의 따님으로 子女를 두지 못했다 長男 仁修는 版圖佐郞中門祗候使요 二男 仁全은 東大悲院錄事인데 일찍 卒하고 三男 墩은 都僉議贊成事로 諡號는 章敬이요 四男仁琦는 密直副使로 諡號는 溫靖이며 婿는 左司議大夫文正公 安東權溥요 次는 國學祭酒光山金滔이며 한분은 傳하지 않는다 公의 墓所는 오랫동안 失傳되어 抱川五代壇 옆에 設壇하고 香火를 올리어 오던중 지난丙子(一九三六)七月에 誌石을 발견하고 墓所를 修封하여 苾芬을 이었다 配洪氏의 산소도 같은 局內에 있으련마는 전하지 않는다 이어 銘辭를 삼가 쓰노니
至孝로 事親하고 勤實로 벼슬살이
忠孝의 雙全함이 麗史에 빛나도다.
官職에 오르심에 品階가 높으시고
朝廷에 계시기가 三十年이 되시었네.
禮文이 散失됨에 新儀를 몸소 짓고
聖節使로 元에 가서 賀禮를 하시다.
활을쏘면 命中이요 환 던지니 必中이라
별이 떨어지니 산이 무너진 듯 世人이 슬퍼했고
易名의 恩典으로 貞愼으로 贈諡했네.
孝行으로 旌閭받아 綽楔이 彬彬하고
文集을 頒布하신 東方의 大賢이셨네
        西紀二千五年丁亥 九月 日
          後孫 貞愼公宗親會長 暎烈 謹撰
          文化柳氏貞愼公宗親會 謹豎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