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선 (柳仁善)

류인선(柳仁善), 감역공(監役公), Ryu, In-Seon, 생몰년:1492-?, 세:18
中宗朝 遺逸, 左相公派, 자 공숙(公叔)

증좌찬성 종(贈左賃成 淙)의 증손이요 증좌찬성 연(演)의 장자로 성종(成宗) 23년 壬子에 포천 자작리(抱川 自作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더니 장성함에 행실이 더욱 돈독하여 예절로써 몸을 닦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할 뿐아니라 아우들로 더불어 우애가 지극하였다. 친상(親喪)을 치름에 반드시 예절을 쫒아 행하고 제사를 받듬에 친히 점검하는 등 공경을 다하였다.
형제에 곤궁한 자에게는 반드시 그 의식(衣食)을 나누어 춥고 굴주림에 이르지 않게 하고, 항상 말하기를 "형제가 한집에 사는 것은 지극히 즐거운 일인데 어찌 조석간이라도 떨어져 살겠는가?" 말하고 잠시라도 서로 만나지 못하면 마음이 울적하여 어쩔줄을 몰랐다. 이로서 온 집안에서 공을 부모같이 섬기고 신명(神明)처럼 두렵게 여겨 안팎으로 이간하는 말이 없었고 자제들도 또한 과오를 범함이 없었다.
중종(中宗) 30년 乙未(1535) 3월 경기도관찰사 윤은필(京畿道觀察使 尹殷弼)이 장계(狀啓)를 올려 이르기를 『유학 류인선(幼學 柳仁善)은 천성이 본래 순후하고 효성스러워 친상(親喪)을 당하여 3년씩 여묘(廬墓)하고 여러 아우들을 어루만져 사랑하기를 마치 자식 같이 대하고 노복(奴僕)과 전답(田畓)을 한결 그들의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니 온 고을에서 칭송하고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같은 사람은 세상에 드무니 청하옵건대 이를 표창하여 비루(卑陋)한 풍속을 고치도록 권장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왕은 가상히 여기시고 칭찬해 마지 않으시며 정려(旅閭)의 명이 있었다. 35년 庚子(1540) 7월 왕께서 교서(敎書)에 이르시기를 "동반 정삼품(東班 正三品)이상 서반 종이품(西班 從二品) 이상의 관원(官員)들은 각기 시골에 숨은 훌륭한 선비들을 천거토록 하라"하시었다. 이때 한성판윤 김안국(漢城判尹 金安國). 예조판서 정옥형(禮曹判書 丁玉亨). 상호군 방호의(上護軍 方好義) 등이 공의 효우의 행실을 천거하여 즉시 사산감역(四山監役)에 제수되었다. 공이 얼마 후 사직하고 돌아오니 거느리고 있던 인부들이 길을 막고 울면서 송별을 아쉬워 하고 그 뒤로도 공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배위는 풍산김씨(豊山金氏)로 자녀를 두지 못하여 공의 아우 형조참판 지선(刑曹參判 智善)의 2자 첩(堞)을 맞아 계자하였는데 봉사(奉幸)를 지내었다.
명종(明宗) 4년 己酉(1549)에 효우문(孝友門)으로 정려(旅閭)가 내리고 그 문전에 샘이 있는데 효우정(孝友井)이란 액호(額號)가 내리었다.
효우문전(孝友門傳)은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이 짓고 썼으며 도곡 이의현(陶谷 字宜顯)이 속전(續博)을 지었다.
공의 묘소는 포천군 신북면 무이산 오리동 선영하 오좌(抱川郡 新北面 武夷山 梧里洞 先塋下 午坐)에 합부(合祔)로 모셔 있으며 숙종(肅宗) 37년 辛卯(1711) 10월에 묘비를 세웠는데 묘표는 쌍호 김재해(雙湖 金載海)가 지었다.
※朝鮮王朝實錄. 孝友門傳

[입력: ryuj 09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