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수 (柳仁修)

류인수 (柳仁修), 중문사공(中門使公), Ryu, In-Soo, 생몰년: ?-?, 세: 11, 中門祇候使公派 파조
고려 충렬왕 조 음사, 초휘 인명(仁明)

공은 문정공 경(文正公 璥)의 손이요, 정신공 승(貞愼公 陞)의 장자이다.
문음(門蔭)으로 출사하여 충렬왕(忠烈王)20년 갑오(1294)12월에 보문서직(寶文署直)으로 재직 중 우승지 류비(右丞旨 柳庇)와 함께 하정사(賀正使)로 원(元)나라를 다녀왔는데 원나라에서『예를 아는 분이라』고 칭찬하였다. 그 후 판도좌랑(版圖佐郞)을 거쳐 중문지후사(中門祗侯使)로 있으면서 정사(政事)를 논함에 정직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배위 고성이씨(固城李氏)는 문희공 존비(文僖公 尊庇)의 따님으로 3남 1녀를 두어 정(靖)은 서해도 안렴사(西海道 按廉使)를 지냈고, 연온(衍昷)과 약언(約言)은 모두 불문(佛門)에 귀의하여 선사(禪師)가 되었으며, 사위는 담양 이예(潭陽 李藝)이다.
아들 정(靖)은 밀직사감찰대언(密直司監察代言)을 거쳐 충혜왕(忠惠王)2년 신사(1341)에 서해도 안렴사(西海道 按廉使)로 나갔다. 이에 앞서 민환(閔渙)이 권세를 잡고 각 도에 사람을 보내어 무당들이 바친 포백(布帛)을 걷어 들이고, 또 산과 바다에서 생산되는 각종 이득을 세금의 명목으로 징수하니 백성들의 괴로움이 헤아릴 수 없었다. 공께서 부임 즉시 도내를 두루 다니면서 간악한 무리들을 체포하여 순군옥 (巡軍獄)에 가두고 장계(狀啓)를 올리니 왕이 듣고 노하여 민환을 축출하였다.
배위는 인천채씨(仁川蔡氏)로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 유(濡)는 나주목사(羅州牧使)요, 홍(洪)은 개성윤(開城尹)이며, 사위는 총랑 전의 이득영(摠郞 全義 李得榮)·밀양군 밀양손언(密陽郡 密陽孫彦)·제주 예안 이승(祭酒 禮安 李昇)·찬성 홍양 이서원(贊成 興陽 李舒原)이다.
공의 묘소를 실전하여 정사(1977) 9월에 후손의 세거지인 담양군 대덕면 비차리 원효동(元曉洞)에 공과 아들·손자 3대의 단을 설치하고 사단비(祀壇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중재 김황(重齋 金榥)이 지었다.
※고려사 祀壇碑文

[입력: ryuj 09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