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자방 (柳子房), 추담공(湫潭公), Ryu, Ja-Bang, 생몰년: ?-?, 세:18
中宗刻 遺逸. 忠景公派, 자 택지(澤之) 호 추담(楸澤).
종부시소윤 한생(宗簿寺少尹 漢生)의 증손이요, 천안군수 훈(天安郡守 纁)의 손이요, 옥천군수 수장(沃川郡守 壽長)의 장자로 외댁(外宅)인 거창(居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더니 장성함에 가정 교훈을 독실히 받아 취양(就養)에 원만하고 조행 (操行)에 법도가 있었으며, 친상을 당하여 슬픔을 다하고 상제(喪祭)의 예를 한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쫒아 행하니 향리에서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경사(經事)를 깊이 탐구하는 한편 성리(性理)의 학문을 전공하여 정밀한 뜻을 체득하고 실천에 독실하더니 동향(同鄕)의 명유(名儒) 지지당 형사보(止止堂 ?士保) . 구산 변벽(龜山 卞肇)등 제현(諸賢)으로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면서 학문을 토론하여 명망이 널러 퍼졌다.
중종(中宗)이 즉위한 후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가 왕의 신임을 얻고 명사(名士)들을 맞아드리기 위하여 현량과(賢良科)를 치렀는데 이때 공께서 형공(?公), 변공(卞公)과 함께 고을에서 선발되므로 사람들이 모두 영예롭게 여겼으나 끝내 응시하지 않았다.
13년 戊寅(1518) 3월 경상도관찰사 김안국(慶尙道觀察使 金安國)이 공을 천거하여 아뢰기를 "유학 류자방(幼學 柳子房)은 거창(居昌)에 거주하는데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고 조행이 밝고 마음이 구차하지 않으며 항상 고인(古人)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에 열중하고 또한 제술(製述)에 능하지만 과거를 보지 않고 이제 나이 50이 넘었는데 유림(儒林)들이 추중하여 공경하고 있읍니다 "하였다.
이로서 금천도찰방(金泉道察訪)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추담(楸潭)위에 정자를 짓고 선영(先塋)의 수호에 종신토록 감모(感慕)의 정을 부치니 고을 사람들이 존경하여 추담선생(楸潭先生)이라 일컫었다.
배위 연일정씨(延日鄭氏)와의 사이에 자녀를 두지 못하였음으로 공의 아우 자운(子雲)의 2자 참봉 당(參奉 堂)을 맞아 계자(系子)하였다.
공의 묘소는 공께서 사시던 거창 개화리 후록 유좌(居昌 開花里 後麓 酉坐)에 모셔 있고 배위는 묘소 아래에 모셔있다.
공의 행장은 노파 이흘(蘆坡 李屹)이 짓고 묘표는 황고 신수이(黃皐 愼守彛)가 지었다.
평생에 지은 시문(詩文)이 많았는데 모두 임진왜란에 없어지고 공의 실행(實行)이 잠곡 김육(潛谷 金堉)의 기묘록(己卯錄)에 간략히 실려 있는데, 그에 이르기를 "조행(操行)이 있어 어버이에 효도하고 친구간에 신의가 있었으며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고 하였으니 백세(百世)의 신필(信筆)이라 하겠다.
숙종(肅宗) 37년 辛卯(1711)에 고을 유림(儒林)들이 용천사(龍泉祠)를 창건하여 공과 형사보(?士保) , 이계준(李繼俊) , 전팔고(全八顧) , 전팔급(全八及) , 서숙(徐䎘) 등 육현(六賢)을 배향(配享), 향사하여 오다가 고종(高宗) 5년 戊辰(1868)에 국금(國禁)으로 훼철되었었는데 근래에 복설(復設)하여 향사하고 있다.
근래에 후손 상흠(尙欽)이 주간하여 묘소 아래에 재실(齋室)을 훌륭히 지었으며 이 밖에도 공의 향사(享祀)에 있어서도 현로(賢勞)가 지대하였다.
※朝鮮王朝實錄. 墓表.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