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자미 (柳自湄)

류자미(柳自湄), 서산공(西山公), Ryu, Ja-Mi, 생몰년: ?-1462, 세:16
端宗刻 節臣., 左相公派, 호 서산(西山)

상의중추원사 원지(商議中樞院事 原之)의 손이요, 기주현감 함(基州縣監 浛)의 장자로 태종조(太宗朝)에 양주(湯州)에서 태어났다.
세종(世宗) 16년 甲寅(1434) 9월 관학교도(館學敎導)로 재직중, 진일재 성간(眞逸齋 成侃)의 청으로 지곡송학도(芝谷松鶴圖)를 그렸는데 당시의 화가(晝家)인 현동자 안견(玄洞子 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와 함께 쌍벽(雙璧)의 명작(名作)으로 일컫고 있다.
40세가 넘어 문종(文宗) 원년 辛未(145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다.
단종조(端宗朝)에 방염승(邦染丞) , 현감(縣監)을 거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재직중, 乙亥(1455) 6월 세조(世祖)의 찬탈(寡奪)로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의분(義惰)을 못이겨 즉시 순절(殉節)을 기도하였으나 여러 아들들의 간곡한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길로 해주 수양산 신광사(海州 首陽山 神光寺)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앞서 입산(入山)하실때 아들들이 따라 갈 것을 청함에 공께서 "나는 이미 세상을 버렸으나 너희들은 처지가 다르니 불가하다"고 거절하였다.
이듬해 丙子(1456) 6월 상왕 복위(上王 復位) 사건이 탄로되어 육신(六臣)이 참화를 당한 소식을 듣고 하산(下山)했다가 포대기에 쌓인 매죽헌 성삼문(梅竹軒 成三問)의 손녀를 몰래 거두어 유모(乳母)를 택하여 기른 후 장성함에 막내 자부(子婦)를 삼았다.
2자 지(輊)가 홍문관교리(弘文館敎理)로 재직중 세조(世祖)께서 가끔 공의 거처를 물었는데 그때마다 "신의 부친은 심질(心?)을 얻어 산수간(山水間)을 방량하고 있나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공께서 만년에 수양산(首陽山)으로부터 양주 도봉산(楊州 道峰山) 서쪽 기습에 옮겨 지냈는데 역시 시(詩)를 읊으며, 구주(舊主) 단종을 사모하고 자신의 심경을 달래니 세상에서 서산선생(西山先生)이라 일컫었다.
공께서 임종(臨終)에 자손들에게 유계(遺戒)하시기를 『내가 산중에 자취를 감춘것은 불도(佛道)를 좋아함이 아니라, 다만 자취를 숨긴것 뿐이니 사후(死後)에 불도로써 장례를 행하지 말라, 또한 구주(舊主)를 위하여 능히 죽지 못했으니 선영(先塋) 곁에 묻지 말것이며, 묘비(墓碑)에 나의 행직(行職)만 기록할뿐이지, 너희들의 영귀(榮貴)로 인한 증직(贈職)은 절대쓰지 말지어다. 』하시고 태연히 돌아가시었다.
유명(遺命)에 의하여 선영에서 10리쯤 떨어진 양주 한동(楊州 漢洞) 지금 양주군 은현면 도하리 항동(楊州郡 隱峴面 道下里 項洞) 뒷산 자좌(子坐)에 장례를 모시고 묘비도 역시 공의 행직(行職)만을 기록하여 세웠다.
배위 진주류씨(晋州柳氏)는 안간공 혜손(安簡公 惠孫)의 손녀요, 현감 진(縣監 瑱)의 따님인데 돌아가신 후 공과 쌍분(雙墳)으로 모시었다.
7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륜(輸)은 현령(縣令)이요, 2남 지(輊)는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어 문양군(文陽君)에 봉해지고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시호는 평간공(平簡公)이요, 3남 진(軫)은 부사(府使)요, 4남 헌(軒)은 사과(司果)요, 5남 원(轅)은 현감(縣監)이요, 6남 보(輔)는 직장(直長)이요, 7남 집(輯)은 정랑(正郎)으로 바로 매죽헌 성삼문의 손서(孫婿)이다. 사위는 도사 파평윤구령(都事 坡平尹龜齡)과 도사 연안김찬(都事 延安金巑)이다.
2남 지(輊)의 귀히 됨으로 인하여 공에게 의정부좌찬성(讀政府左贊成)이 추증(追贈)되었다.
중간에 묘소를 실전(失博)하였었더니 숙종(肅宗) 7년 辛酉(1681)에 8대손 세정(世鼎)이 묘하에서 단갈(短碣)을 발견하였는데 그 전면에 통훈대부행사헌부감찰류자미지묘(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柳自湄之墓), 후면에 천순육년임오사월초팔일립(天順六年壬午四月初八日立)이라 새겨 있어 즉 세조(世祖) 8년 壬午(1462)에 세운 비였다.
드디어 공의 묘소를 확인하고, 16년 庚午(1690)에 봉분(封墳)을 수축하였다.
영조(英祖) 5년 己酉(1729) 9월에 출계(出系) 8대손 생원 세주(生員 世冑)가 사재(私財)를 기우려 묘비및 제반 석의(石儀)를 성대히 갖추었는데 묘표(墓表)는 도암 이재(陶庵 李縡)가 짓고, 두전(頭箋)은 지수재 유척기(知守齋兪拓基)가, 비문은 회와 윤양래(晦窩 尹陽來)가 각기 썼다.
도곡 이의현(陶谷 李宜顯)이 전(傳)을 지었는데 그 일절에 "공의 절의는 백이 숙제(伯夷 叔齊)와 같이 밝고, 열경(悅卿 : 金時習의 宇)과 같이 높도다. 그에 비유하는 이 평론이 가히 옳으리라,"하였다.
정조(正祖) 초엽에 몽오 김종수(夢梧 金鐘秀)가 양주목사(楊州牧使)로 재임시 사림(士林)의 정문(呈文)을 보고 묘소 수호를 당부하는 완문(完文)을 내렸는데 그 일절에 "류선생의 고상한 절의는 내 일찍 들었으나 이제야 그 자세한 내용을 알았다. 또 묘소마저 본군(本郡) 경내에 있으니 격앙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다. "고 하였다.
정조 8년 甲辰 (1784)에 양주(楊州) 유생(儒生)들이 3차의 상소로서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을 향사하는 청절사(淸節祠)에 공을 병향(並享)할 것을 청하여 마침내 배향(配享)하였다.
15년 辛亥(1791) 2월 27일 성균관사성 성종인(成均館司成 成種仁)의 상소(上疏)에 의하여 정조께서 내린 비답(批答)일절에 "생육신(生六臣)과 같은 절의(節義)가 있는데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이가 12인이다. 이제 마땅히 표창하리라."하셨는데 공의 성명이 그 가운데 일곱째로 기록되었다.
고종(高宗) 36년 己亥(1899)에 15대손 수당 인석(?堂 寅奭)이 공의 유시(遺詩) 및 제반 문헌(文獻)을 수집 『西山先生 實記』를 간행하였다.
순종(純宗) 3년 己酉(1909)에 나주 신촌(羅州 莘村) 지금 광산군 본양면 동호리(光山郡 本良面 東湖里)에 소재한 공의 사당(祠堂)에 『忠賢閣』3자의 어필(御筆)이 내리고, 戊午(1918)에 국헌 이승욱(菊軒 李承旭)이 충현각기(忠賢閣記)를 지었으며, 庚申(1920)에 전이조참판 진암 김종규(前吏曹參刻 振菴金宗圭)가 공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甲辰(1964)에 양산군 양산읍 산막동(梁山郡 梁山邑 山幕洞)에 칠현사(七賢祠). 乙巳(1965)에 광산군 본양면 덕림리(光山郡 本良面 德林里)에 덕림사(德林祠)를 복설(復設)하여 매년 유림(儒林)에서 향사(享祀)하고 있다.
壬戌(1982)에 전국 유림의 공의로 공주 계룡산 동학사(公州 鷄龍山 東鶴寺) 경내에 소재한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되었다.
공께서 시화(詩晝)에 능하여 유품(遺品)이 많았을 것인데 병란(兵亂)에 유실되어 겨우 시 16수가 시고(詩稿)에 전하고, 회화(繪晝) 지곡송학도(芝谷松鶴圖) 1편이 서울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소장되어있다.
후손은 포천(抱川) , 울산(蔚山) , 양산(梁山) , 광산(光山) , 여주(驪州) , 이천(利川) , 영천(氷川) , 신천(信川) , 해주(海州) , 양천(陽川)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 , 國朝榜目 , 莊陵誌 , 典故大方 , 淸節祠追享疏 , 西山先生賣記 , 誌狀輯雲, 號譜

[입력: ryuj 09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