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자신(柳自新),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Ryu, Ja-Sin, 생몰년:1541-1612, 세:20
光海朝 國舅, 中門祇候使公派, 자 지언(止彦)
중랑장 중의(中郞將 仲宜)의 6대손이요, 공조판서 잠(工曹判書 潛)의 장자로 중종(中宗) 36년 辛丑 12월 2일에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순후하더니 장성함에 몸가짐이 엄하고 사물을 접함에 온화하였다.
일찍이 정존재 이 담(靜存齋 李 湛)의 문하에서 수업, 당시 사우(士友)들의 추중한바 되었다.
명종(宣祖) 19년 甲子(1564)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상(喪)에 공의 부친께서 태릉(泰陵) 수직(守直)의 명을 받고 몸이 편찮았는데 왕의 하교(下敎)에 이르시기를 <수릉관(守陵官)이 질병이 있다 하니 그아들을 릉참봉(陵參奉)을 삼아 그 부친을 간호하도록 하라>하시었다. 이로써 태릉참봉(泰陵參奉)이 되어 22년 丁卯(1569)에 왕후(王后)의 상(喪)을 마친뒤 돈녕부직장(敦寧府直長)에 임명되었다.
선조(宣祖) 2년 己巳(1569)에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 장원서장원 (掌苑署掌苑)을 거쳐 평강현령(平康縣令)으로 나갔다가 4년 辛未(1571)에 해임되어 사과(司果)가 되었다. 이듬해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승진하고 이어 형조정랑(刑曹正郞)을 거쳐 8년 乙亥(1575)에 김포현령(金浦縣令)으로 나갔었다.
이듬해 겨울 부친 상을 당하여 3년을 여묘(廬墓)하고 12년 己卯(1579)에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제수받고, 얼마 후 김제군수(金堤郡守)로 나갔다가 모친의 나이 70이 되어 사임하고 돌아왔으나 다시 한성판관(漢城判官)에 제수되었다. 이어 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을 거쳐 양근군수(陽根郡守)로 나갔다가 14년 辛巳(1581) 겨울에 체임되어 이듬해 상의원판관(尙衣院判官)에 제수되었다. 16년 癸未(1583)에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에 옮겼더니 18년 乙酉(1585)에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에 전직되었다.
20년 丁亥(1587) 3월, 공의 제 3녀가 왕자 광해군(光海君)의 부인(夫人)으로 간택(揀擇)되었는데 후일 광해군(光海君)의 비 류씨(妃 柳氏)이다.
이해 여름 모친상을 당하고 집례(執禮)를 한결 전상(煎喪) 때와 같이 행하고 22년 己丑(1589)에 한성판관(漢城判官)에 제수되고, 겨울에 안악현감(安岳縣監)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역적 정여립(逆賊 鄭汝立)의 잔당(殘黨)을 소탕한 공으로 승진하여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제수되었다.
25년 壬辰(1592) 4월 왜적들이 쳐들어와 도성(都城)을 핍박하게 되자 왕은 광해군(光海君)을 왕세자(王世子)로 삼는 한편 부인(夫人)은 세자빈(世子嬪)으로 삼고 공으로 하여금 동궁(東宮)을 호위토록 하였다. 이로부터 광해군(光海君)을 호종(扈從)하며 돈녕부도정(敦寧府都政)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를 거쳐 이듬해 가을 성천도호부사(成川都護府使)로 나갔다가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받고 파직 되었다. 28년 乙未(1595)에 호군(護軍)을 거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겸하고 31년 戊戌(1598)에 (明)나라의 감군포정사(減軍布政史) 양조령(梁祖齡)의 부하를 구타한 사건으로 파면되었다가 얼마 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승진,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세자빈 류씨(世子嬪 柳氏)의 원손(元孫) 탄생으로 인하여 개성유수(開成留守)에 승진되고, 34년 辛丑(1601)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使)에 승진되었다.
戊申(1608) 2월에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여 류씨(柳氏)가 왕비(王妃)로 책봉됨에 따라 공에게는 국구(國舅)의 예로서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輔國崇祿大夫 領敦寧府使)에 승진됨과 아울러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로부터 공께서 가문의 성만(成滿)함을 두려워하고 겸손과 공경을 더욱 돈독히 하며,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할 뿐 아니라 세간사(世間事)에 관여하지 않고 시정(時政)의 득실과 현사(賢사)의 진퇴에 뜻을 두지 않았다. 2년 庚戌(1610) 가을에 공의나이 70세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풍악(風樂)과 어주(御酒)를 하사 받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이듬해 겨울 병환으로 자리에 누워 4년 壬子 2월 7일에 돌아기시니 향년 72세로 안산 잉화면 광곡 목실리 선영하인좌(安山 仍火面 廣谷 木實里 先塋下 寅坐)에 예장(禮葬)되고, 이듬해 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공은 천성이 염정(염精)하여 오직 도서(圖書)를 즐기고 경사(經史)에 유심하여 늙도록 책을 놓지 않았다. 만일 고인(古人)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보면 반드시 여러 자질(子姪)들로 하여금 기록하여 본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집에서나 관직에 있어서나 법도(法度)를 쫓아 행하고, 의복과 음식에 사치와 화려함을 경계하여 비록 지극히 귀한 처지였지만 선비 본연의 뜻을 잃지 않았다.
모친께서 홀로 계신지 10여년 동안 기쁜 얼굴과 부드러운 태도로 성의를 다하여 좌우의 봉양에 힘쓰고, 또한 서모(庶母)가 계시어 나이가 젊었으나 자녀를 두지 못하신지라 공께서 섬기기를 친모와 같이 하니 서모(庶母)가 공의 효행에 감동하여 80의 고령(高齡)을 누리시고 편안히 돌아가시었다. 아우 한분이 계셨는데 우애가 매우 독실하여 잠 자리를 함께하고, 혹 관직으로 서로 떠나게 되명 섭섭하여 마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를 대접함에 빈천(貧賤)하다고 버림이 없었고, 종족을 접대함에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았다. 또한 재주가 있으나 출세하지 못한 이는 추천하고, 가난하여 병으로 누워있거나 혼상(婚喪)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는데 힘을 다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을 숭베하고 존경하여 마치 자기 부형(父兄)같이 여기었다.
배위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좌의정 임당 유길(左議政 林塘 惟吉)의 따님으로 봉원부부인(蓬原府夫人)에 봉작 죄었으며 6남 4녀를 두고 80세로 돌아가시니 공의 묘소에 합부(合부)하였다.
아들 희갱(希갱)은 진사(進士)요, 희담(希聃)은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요, 희분(希奮)은 병조판서 문창부원군(兵曹判書 文昌府院君)이요, 희발(希發)은 호당(湖堂)에 들고 이조참의(吏曹參議)요, 희량(希亮)은 호당(湖堂)에들고 예조참판(禮曹參判)이요, 희안(希安)은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이며, 사위는 한성부좌윤 한양조국필(漢城府左尹 漢陽趙國弼), 병조정랑 부평이덕일(兵曹正郞 富平李德一), 조선(朝鮮) 15대 임금 광해군 이 혼(光海君 李 혼), 은율현감 광산김시보(殷栗縣監 光山金寺輔)이다.
대제학 서경 류근(大提學 西坰 柳根)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짓고, 병조참의 동복오정(兵曹參議 同腹吳靖)이 비문을 썼으며, 우의정 선원 김상용(右議政 仙源 金尙容)이 전(篆)을 썼다.
후손이 시흥군 소하읍 광명리(始興郡 所下邑 光明里). 수암면 산현리(秀岩面 山峴里). 군자면 군자리(君子面 君子里). 김포군 월곶면 포내리(金浦郡 月串面 浦內里). 계양면 독실리(桂陽面 纛室里). 평창군 진부면 수항리(平昌郡 珍富面 水項里). 대화면 하안미리(大和面 下安味里). 평택군 팽성읍 남산리(平澤郡 彭城邑 南山里). 용인군 원삼면 미평리(龍仁郡 遠三面 彌坪里), 연기군 전의면 고등리(燕岐郡 全義面 高登里)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 朝鮮王朝實錄, 神道碑銘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