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전(柳琠), 문정공(文貞公), Ryu, Jeon, 생몰년:1531-1589, 세:19
宣祖朝 相臣. 左相公派, 자 극후(克厚). 호 우복당(愚復黨) 시 문정공
증좌찬성 종(贈左贊成 淙)의 현손이요, 증영의정 예선(贈領議政 禮善)의 2자로 중종(中宗) 26년 辛卯 5월 19일 포천 자작리(抱川 自作里)에서 태어났다.
겨우 말을 배울때 바로 문자(文字)를 알아 어려서부터 조행(操行)과 식견(識見)이 성인과 같았다.
재종조(再從祖) 노포당 순(老圃堂 洵)께서 지은 미인도시(美人圖詩)를 읽고 공께서 말하기를 <풍자(諷刺)의 시(詩)이다.>하니 듣는 이들이 크게 놀라고 이르기를 “이 아이는 재상(宰相)의 재목이다.”하였다.
경술(經術)에 전공하여 학업이 날로 진취하더니, 명종(明宗) 7년 壬子(1552)에 22세로 진사(進士)에 급제, 성균관(成均館)에 유학(遊學)하고,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부정자(弘文館副正字)에 보직되고 이어 기주관(記注官)에 옮겼는데 문필(文筆)이 매우 민첩하므로 대제학정사룡(大提學鄭士龍)이 천거하여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다.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 재직중 11년 丙辰 (1556)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고 그로부터 저작(著作). 박사(博士). 수찬(修撰). 전적(典籍). 병조좌랑(兵曹佐郞).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장령(掌令). 홍문관교리(弘文館敎理). 응교(應敎). 의정부검상사인(議政府檢詳舍人).이조정랑(吏曹正랑)등 청환직(淸宦職)을 두루 지내어 명망이 크게 떨쳤었다.
당시 문원(文苑)의 선발과 언사(言事)의 책임을 공이 모두 주장하였고 더욱이 간쟁(諫爭)에 주력하여 간당(奸黨)을 배척하고 유현(儒賢)을 진출시킴은 물론 원통한 일을 신설(伸雪)하여 조처하는 바가 다 그 정의를 잃치 않았다.
18년 癸玄(1563)에 호당(湖堂)의 팔학사(八學士)를 선발하였는데 당시 고명한 명사(名士)들로서 공이 제 3인으로 뽑히었다.
이듬해 인재 홍섬(忍齎 洪暹). 황강 김계휘(黃岡 金繼輝)등 18인으로 더불어 빈청(賓廳)에 나가 응제(應製)할 때 공이 칠언윤시(七言輪詩) 2수를 지어 바치니 왕께서 칭찬하시고 비단 한필을 하사 하시었다.
20년 乙丑(1565)에 요승 보우(妖僧 普雨)를 처형할 것을 주장하여 마침내 제주(濟州)로 귀양 보내고 동년 가을에 여러 간관(諫官)으로 더불어 합계(合啓)하여 간신 윤원형(奸臣 尹元衡)을 논죄(論罪)하고, 乙巳사화에 피화(被禍)된 여러 신하들의 원통함을 신설(伸雪)할 것을 청하여 모두 윤허(允許)를 얻었다.
선조(宣祖)께서 즉위하신 후 승지 박소립(承旨 朴素立)의 비위(非違)를 탄핵하고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를 거쳐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재직중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여 우계 성혼(牛溪 成渾)선생을 등용할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8년 乙玄(1575)에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서 승문원제학(承文院提學)을 겸하고, 이듬해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겸하고 10년 丁丑(1577)에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특배되었다. 이에 앞서 율곡 이이(栗谷 李珥) 선생이 乙巳 사화에 피화(被禍)된 여러 신하들을 신원(伸寃), 복관(復官)할 것을 수차에 걸쳐 계주(啓奏)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는데 공이 조용히 왕에게 아뢰기를 “乙巳사화는 오로지 윤원형(尹元衡)에게서 발단되어 원형의 죄가 이미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제현(諸賢)의 복관(復官)을 어찌 늦추십니까. 속히 윤허하여 주십시요.”하였다. 이에 왕께서 마침내 윤허하여 당시 피화되었던 여러 사람이 복직(復職)되고, 이기(李芑)등의 관작과 공신호(功臣號)가 삭탈되었다.
12년 己卯(1579)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승진,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겸직하였는데 乙丑으로부터 이때까지 조정 대사(大事)를 공이 참여하여 알지 못함이 없었고 알면 말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말하여 청원(請願)을 해결하지 못함이 없었으나 그러나 매양 타인(他人)앞에 나서지 않아 세상에서 자신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당시 충청도의 풍속이 심히 우완(愚頑)하매 조정에서 백성들에게 추앙받는 이를 선택하여 이듬해에 공을 관찰사(觀察使)로 임명하였다. 이에 동료들이 공이 좌천(左遷)됨을 민망히 여기니 공이 태연히 말하기를 “신하로서 진실로 국가에 유익한 일이면 한고을의 수령(守令)이라도 짐짓 사양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일도(一道)의 방백(方伯)으로 나가는데 하등 상관이 있겠는가?”하고 부임하니 백성들이 서로 경계하여 개과천선(改過遷善)하고 여러 고을이 태평하여 모두 비석을 세워 공의 은덕을 칭송하였다.
14년 辛巳(1581)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옮겼다가 16년 癸未(1583)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내고 18년 乙酉(1585)에 특명으로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승진되었다.
21년 戊子(1588)에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를 다녀와 12월에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이듬해 정월 영의정(領議政)에 제수되었다.
이 해에 큰 흉년이 들고 재앙이 자주 일어남에 공께서 근심하고 수차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공이 본래 기질(奇疾)이 있었는데 역적 정여립(逆賊鄭汝立)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느라 몇 달을 쉬지 못하더니 옥사가 처결된 후 질병이 악화되어 자리에 누움에 즈음하여 자질(子姪)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하늘이 종사(宗社)를 도우사 죄인을 다스렸으니 내 가히 눈을 감겠도다.”하시고 드디어 돌아가시니 때는 선조(宣祖) 22년 己丑 10월 28일로 향년 59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왕은 매우 슬퍼하시고 3일간 조회(朝會)를 거두시는 한편 사제(賜祭)를 명하시었다.
포천(抱川)고을 남쪽 향적산(香積山)아래 해좌(亥坐)에 장례를 모셨더니 후에 지금 포천군 일동면 갈명리 금주산 남록 자좌(抱川郡 一東面 吉明里 金柱山 南麓 子坐)로 이장하였다.
이듬해 庚寅(1590) 8월에 정여립(鄭汝立)의 역란(逆亂)을 평정한 공으로 평나훈(平羅勳) 2등에 책록됨과 아울러 시령부원군(始寧府院君)에 봉해졌다.
공은 용모가 화평하고 의지가 강방하여 행실이 착하였으니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3년을 여묘(廬墓)하고 모든 예절을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쫓아 행하였으며,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여 화락하게 지냄은 물론 음식을 반드시 함께 하고, 무이산(武夷山)중에 있는 전토(田土)를 백형(伯兄)에게 주어 졍작토록 하였다.
공이 전형(銓衡)을 관장하면서 공의(公議)를 따르니 사람들이 사사(私事)를 감히 요구하지 못하였다.
또 사람의 기개(氣槪)를 보아 등용하였으니 병조(兵曹)에 있을 때 무인 손효순(武人 孫孝舜)을 길에서 만났는데 그 언어(言語)가 쾌활함을 보고 채용하여 곤수(閫帥)에 이르렀으며,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이 하료(下僚)로 있을 때 그의 곧은 기품을 보고 즉시 천거하여 후일 대공(大功)을 세우니 사람들이 모두 공의 지감(知鑑)을 탄복하였다.
선조(宣祖) 즉위 후로 사류(士類)들이 분렬되어 조정에 완전한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공은 구신(舊臣)으로서 가히 장단(長短)을 말함이 없었으며 드디어 정승(政丞)에 이르러 정사(政事)에 전력하다 돌아가시니 모두 애석히 여기었다.
배위 안동김씨(安東金氏)는 현령(縣令) 업(業)의 따님으로 어진 법도가 있어 공을 내조(內助)하는데 어김이 없었고 2남 3녀를 두었으니 장자 희서(熙緖)는 선조(宣祖) 己卯에 진사에 급제하고 丙戍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도승지(都承旨).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낸후 유성군(流星君)에 봉하고, 2자 유서(裕緖)는 삼종숙 경선(三從叔 敬先)에게 출계하였으며, 사위는 군수 덕수이통(郡守 德水李通). 현령 안동권준(縣令 安東權晙). 찰방 경주김성진(察訪 慶州金聲振)이다.
정조(正祖) 때 예조판서 김이익(禮曹判書 金履翼)이 공의 시장(諡狀)을 짓고, 고종(高宗) 8년 辛未(1871) 3월에 문정공(文貞公)의 시호(諡號)가 내렸다.
공의 부조묘(不祚廟)가 포천군 소흘면 고모리(抱川郡 蘇吃面 古毛里)에 있다.
※朝鮮王朝實錄. 諡狀. 燃蔬室記述. 人物誌. 號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