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 (柳汀), 송호공(松濠公), Ryu, Jeong, 생몰년:1537-1597, 세:19
宣祖朝 倡義. 左相公派, 자 여원(汝元). 호 송호(松壕)
서산 자미(西山 自湄)의 증손이요, 부사 진(府使 軫)의 손이요, 만풍정 광선(晩楓亭 光先)의 2자로 중종(中宗)32년 丁酉생이다.
임진왜란에 아들 영춘(榮春), 조카 백춘(伯春)으로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언양(彦陽) . 영천(永川). 경주(慶州)등지에서 왜적을 대파(大破)하니 온 군사들이 공의 지략(智略)에 탄복하고 용양대원수(龍驤大元帥)라 일컫었다.
당시 선조(宣祖)께서 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하시면서 연릉부원군 이호민(延陵府院君 李好閔)으로 하여금 교서(敎書)를 반포케 하였는데 공께서 조카 백춘(伯春)을 시켜 언문(諺文)으로 번역, 남녀 노소를 모아놓고 낭독하게 하니 듣는 사람이 모두 감동하여 적개심이 더욱 분발하였다. 이로부터 격문(檄文)을 사방에 돌리고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순식간에 많은 장정(壯丁)이 모여 들었다.
甲牛(1594)에 순찰사(巡察使)가 인솔하는 관군(官軍)에 합세(合勢), 창암(蒼砐)에서 일대 격전을 벌리던 중, 아들 영춘(榮春)이 군량(軍糧)을 보급하다가 왜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戰死)했다. 丁酉(1597)에 공께서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팔공산(八公山)에서 싸우다가 말의 오른 발이 땅에 미끄러져 미쳐 몸을 돌리지 못하고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아 마침내 군중(軍中)에서 순절(殉節)하니 동년 9월 23일로 향년 61세였다. 일군(一軍)의 호곡(號哭) 속에 경주심원 자좌원(慶州深怨 子坐原)에 장례를 모시고 탓던 말은 운현(雲峴)에 묻어 의마총(義馬塚)이라 표시하였다. 경주부윤 윤인함(慶州府尹 尹仁涵)이 공의 공적을 경주 객관(慶州客館)에 기록하여 찬탄을 아끼지 않았고, 후에 군공(軍功)으로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에 증직됨과 아울러 선무원종삼등훈(宣武原從三等勳)에 책록되었다.
배위 평산신씨(平山申氏)와의 사이에 1남을 두어 영춘(榮春)역시 부친을 따라 창의(倡義)하여 임진왜란에 전사하였다. 영춘(榮春)은 배위 순천박씨(順天朴氏) 세경(世經)의 따님과 사이에서 1남을 두어 태영(泰英)인데, 태영이 또한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창의하여 쌍령진(雙嶺陣)에서 전사하니 바로 3대가 전란(戰亂)에 순절(殉節)한 셈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평정된 후 경주부윤 민기(慶州府尹 閔箕)가 공의 삼대 충절(三代 忠節)을 기리어 후서(後序)를 지었는데 그에 이르기를 <공의 지혜는 족히 병상(兵象)을 알았고 힘은 족히 강한 왜적을 막았으며 충성은 족히 국가를 보위하였다.몸은 비록 초야(草野)에 묻혀 반급(半級)의 관직도 돌아보지 않고 선세(先世)의 유업(遺業)을 사모하여 분연히 전쟁에 나가 감포(甘浦)의 수전(水戰)과 창암(蒼暗)의 화공(火攻)과, 팔공산(八公山)의 검전(劍戰)으로 적의 목을 천여급(千餘級)을 베었지만 자기 공(功)은 하나도 드려내지 않고 여러 군사(軍士)에게 사양하였다. 그 신용(神勇)한 비책(秘策)과 경양(謙讓)한 기풍(氣風)은 예부터 지금까지 다만이 하나가 있을 따름이라. 내가 그 훈열(勳烈)의 민몰 됨을 애석히 여기는 바이다. 지금 북로(北虜)의 변란은 신자(臣子)로서 차마 보고 듣지 못할 일인데 그 손자 태영(泰英)이 또한 집안 대대로 전하는 아름다운 선업(先業)에 감동하여 척검(尺劍)으로 칼날을 무릅쓰고 적진(敵陣)에 나가 마침내 쌍령(雙嶺)에서 전사(戰死)했으니 이 아버지에 이 아들이 있고 이 손자가 있음을 류공(柳公)의 가문(家門)에서 비로서 보겠도다. 일문 사의(一門四儀)는 가히 일월(日月)로 빛을 다투리니 격앙하고 흠모함을 이기지 못하고 윤상공(尹相公)의 제후(題後)에 쓰노니 아름답다> 하였다.
퐁산류광목(豊山柳光睦)이 행장(行狀)을, 파평윤인석(坡平尹仁錫)이 전(傳)을, 문소김홍락(聞昭金鴻洛)이 단비명(璮碑銘)을, 월성손후익(月城孫厚翼)이 유허비문(遺墟碑文)을, 벽진이태일(碧珍李泰一)이 사의사실기서(四儀士實記序)를 각기 짓고, 공의 저서(著書) 송호일고(松壕逸槁) 서문(序文)은 풍산류도승(豊山柳道昇)이 지었다.
묘소를 실전(失傳)하여 장질 백춘(長姪 伯春)의 묘소 국내(局內)에 초혼설단(招魂設璮)하고, 양산 칠현사(梁山 七賢嗣)에 배향(配向)하였으며, 울산(蔚山). 양산군지(梁山郡誌)에 공의 사행(事行)이 실려 있다.
후손은 울산군 범서면 척과리(蔚山郡 凡西面 尺果里). 영천군 고경면 대성동(永川郡 古鏡面 大成洞). 월성군 서면 건천리(月城郡 西面 乾川里)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松壕日記.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