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식(柳庭植), 지평공(持平公), Ryu, Jeong-Sik, 생몰년:1822-1889, 세:26
高宗朝 文臣. 忠景公波, 자 의경(義卿). 호 삼락당(三樂堂).
한성판윤 경생(漢城判尹 京生)의 4자 사직 집(司直 緝)의 10대손이요, 증동중추 홍(贈同中樞 泓)의 3자로 순조(純祖) 22년 壬午 5월 2일에 남원(南原)에서 태어났다.
일찍 경전(經傅)을 통독하여 구두(句讀)가 정확하고 문의가 해박하여 제배(儕輩)의 추종을 불허하더니 고종(高宗) 6년 己巳(1869) 3월 문과(文科)에 급제하니 당년 48세였다.
기거주(起居注)를 거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지내고 얼마 안되어 8년 辛未(1871) 9월에 모친 상을 당하여 슬픔이 지나쳐 몸이 쇠약하기에 이르렀다.
11년 甲戌(1874)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어 재직중 13년 丁丑(1877) 9월, 부친 상을 당하여 여묘(廬墓)로서 예제를 다하고, 복제(服制)를 마치자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에 제수되었다가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로 옮겼더니 얼마후 내직으로들 어와 이조정랑(吏曹正郎)이 되었다.
21년 甲申(1884) 10월, 정변(政變)이 일어나 마침내 어가(脚駕)가 파천(播遷)함에 이르렀는데 공께서 하료(下僚)들을 거느리고 경기도 관찰사 심상훈(京畿道 觀察使 沈相薰)과 함께 주상을 호위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이듬해 성환토찰방(成歡道察訪)으로 나가 청렴 결백하게 정사(政事)를 펴니 관리들은 두려워 하고 백성들은 사모하여 마지 않았으며, 드디어 암행어사(暗行御吏)의 계문(啓聞)이 있었고 23년 丙戌(1886)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옮겼다가 얼마 안되어 병조정랑(兵曹正郎)에 제수되었다.
26년 己丑 11월8일 졸하니 향년 68세로 지금 남원군 수지면 가정리 좌록 을좌(南原郡 水旨面 柯亭里 左麓 乙坐)에 묻히셨다.
공께서 천성이 충후(忠厚)하고 효순(孝順)하여 관직에 있어서는 근실하여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고, 집에 있어 어버이를 모심에 친히 지체(志澧)의 봉양을 다하였으며 형제간에는 화목함이 이를데 없었다.
공의 묘갈명은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이 지었다.
배위 순흥안씨(順興安氏)는 기(機)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있었으며 1남 1녀를 두어 아들은 환철(煥喆) 이요, 따님은 경주이동호(慶州李東浩)에게 출가하였다.
※ 墓碣銘, 國朝榜目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