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수(柳廷秀), 관재공(觀齋公), Ryu, Jeong-Soo, 생몰년:1451-1501, 세18
成宗朝 文臣. 忠景公派, 자 국준(國俊), 호 관재(觀齋).
전사령 좌(典祀令 佐)의 증손이요 감찰 상영(監察 尙榮)의 손이요, 금천현감 주(衿川縣監 霔)의 아들로 문종(文宗) 원년 辛未 11월 2일생인데 13세에 부친을 여의었다.
33세 되던 성종(成宗) 14 癸卯(1483)에 문과(文科)에 급제 전교서부정자(典校署副正字)에 보직되었다가 이듬해 박사(博士)에 승진하였다.
17년 丙午(1486)에 모친 상을 당하여 복제(服制)를 마치고 20년 己酉(1489)에 남부주부(南部主簿)에 제수되었더니 이어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형조좌랑(刑曹佐郎)을 거쳐 22년 辛亥(1491)에 영안도도사(永安道都事)로 나가 연변(沿邊)의 읍성(邑城)을 증축하는 공사를 감독하면서 인부를 자비롭게 부리고 역사(役事)를 민활하게 주간하여 쉽게 일을 마치니 백성들이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변경 (邊境)이 편안하였다. 이에 관찰사 성준(觀察使 成俊)이 매우 추중하고 그 사실을 조정에 알리니 드디어 유임(留任) 되었다. 25년 甲寅(1494)에 내직으로 들어와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郎)을 지내었다.
연산군 3년 丁巳(1497)에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에 올라 다시 전설사첨정(典設司僉正)에 옮기고 이듬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제수되었다. 그 해에 무오사화(戊午士耐)가 일어나 김종직(金宗直)의 시체를 육시(戮尸)할 것을 의논하는데 온 조정이 모두 두려워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께서 분연히 여러 관료를 거느리고 항론(抗論)하다가 연산군(燕山君)의 진노(震怒)를 입고 초산(楚山)으로 장배(杖配)되었다가 이듬해 가을 방면되어 돌아왔다.
7년 辛酉 9월18일 한양 북부 관광방(漢陽 北部 觀光坊) 자택에서 향년 51세로 돌아가시니 동년 12월 17일 고양(高陽) 남쪽 원당리 술좌(元堂里 戌坐) 언덕에 장례를 모시었다.
호음 정사룡(湖陰 鄧士龍)이 묘지명(墓誌銘)을 짓고 양곡 소세양(陽谷 蘇世讓)이 묘갈명을 지었다.
후에 아들 송암 관(松庵 灌)이 귀히됨으로 말미암아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증직되었다.
공께서 뜻을 돈독히하고 학문에 열중하되 성리서(性理書)에 더욱 정진하여 오묘한 뜻을 탐색하지 않음이 없어 일시 명류(名類)들의 추중(推重)한 바 되었다. 또한 행실이 단정하고 정직하였는데 일찍이 회시(會試)에 응시하여 장차 경서(經書)를 강독(講讀)하려는 참에 성균관(成均館)의 관노(官奴)가 과장(科場)을 출입하면서 몰래 강독(講讀)에 응할 편장(篇章)을 종이에 써서 주며 후사(厚謝)를 요구하였다.
선비들도 또한 그를 취하여 급제하려 하므으로 공께서 정색(正色)하며 꾸짖기를 『어찌 양심을 속여 요행으로 출세를 바라겠는가?』 하고 거절하였다. 그 해에 공이 등재(登第)하니 사림(士林)들이 그 지조 지킴을 추중하고 당시 사실을 미담(美談)으로 전하였다.
평소에 청렴하고 근신함으로 사람들이 감히 사사(私事)로 요구함이 없었으며 공께서 관직에서 물러나 가세(家勢)의 곤궁함을 꺼리지 않고 서책(書冊)에만 열중하여 자제들을 교도함으로 모두들 감복하여 마지 않았다.
배위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만호 윤손(萬戶 潤孫)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뛰어나 효도로써 시모(?母)를 섬기고 엄정하게 자녀를 가르치며 화목으로 종족을 대하였다. 한편 근엄한 성품이 늙도록 쇠하지 않았으며 향년(享年)이 높은 데다 여러 아들이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봉양을 극진히 함으로 세상에서 모두 그 영화를 우러러 마지 않았다.
5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 환(渙)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요, 함(涵)은 부사(府使)요, 엄(渰)은 사도시정 (司導寺正)이요. 관(灌)은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이요, 심(深)은 진용교위(進勇校尉)이며, 사위는 충의위 파평윤종(忠義衛坡平尹悰)과 순창조위(淳昌趙偉)이다.
※朝鮮王朝實錄. 輿地勝覽. 墓碣銘. 號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