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즙 (柳楫)

류즙(柳楫), 백석공(白石公), Ryu, Jeup, 생몰년:1585-1651, 세:21.
仁祖朝 儒賢, 檢漢城公派, 자 용여(用汝), 호 백석(白石).

류집(柳楫) 공은 창평현령 효중(昌平縣令 孝中)의 6대손이요 소곡 태형(樹谷 泰亨)의 장자로 선조(宣祖) 18년 乙酉 5월 8일에 김제 수곡(金堤 樹谷)에서 태어 났다.
어려서부터 엄연함이 성인(成人)과 같아 여러 아이들이 놀다가 다투는 것을 보면 반드시 꾸짖어 말리고 듣지 않으면 피해 버렸다.
7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궤전(饋奠)과 곡읍(哭泣)의 절차가 지성스러우므로 보는 이마다 칭탄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당시 조모(祖母)께서 생존하여 계셨는데 다른 사람이 혹 음식을 주면 반드시 할머니께 갖다 드리고 맛을 보신 연후에 물러 났었다. 그리고 지성스럽게 책을 읽음에 어른들이 그 건강을 염려하여 때때로 쉬기를 권하면 뜻을 잠깐 순종하다가 다시 책을 읽곤 하였다.
선조(宣祖) 30년 丁酉(1597) 왜적이 재침(再侵)하자 부친을 따라 강원도(江原道)로 피난하였는데 비록 난리중이라도 그 언어와 행동이 조금도 방종하지 않았다. 한편 피란생활에 식량이 끊어지자 친히 동냥자루를 들고 정성스레 구걸하니 사람들이 그에 감동하고 아낌없이 주어 부자(父子)가 끼니를 잇는데 힘입은 바 컸었다.
난리가 그친 후 집에는 다만 대학(大學)책 한권만 남아 있어 송독(誦讀)을 그치지 않고 더욱 탐구하며 재색지계(在色之戒)를 능히 지켜 속임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어려운 일이라 하였다.
일찍이 석계 최명룡(石溪 崔命龍)을 쫓아 글을 배웠는데 석계께서 심히 칭찬하고 중히 여기었다. 얼마 후에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선생의 문하에 취학하여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등을 배웠는데 선생께서 매우 아름다이 여기시고 권장하여 이르기를 『우리 무리에 사람이 있도다』하시었다.
광해군(光海君) 8년 丙辰(1616)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다. 이 때에 인륜(人倫)과 강상(綱常)이 무너져 사람들이 사특한 논리(論理)로 추시부세(趨時附勢)하였으나 공께서는 정의(正義)를 부식(扶植)하여 대도(大道)를 솔선하니 이에 힘입어 화망(禍網)에 빠지는자 매우 적었었다.
인조(仁祖) 2년 甲子(1624) 2월에 이괄(李适)의 반란(叛亂)이 일어나 왕께서 공주(公州)로 파천(播遷)하심에 공께서 적개심에 분발하여 진사 신유일(進士 辛惟一), 감찰 고순후(監察 高循厚)등과 더불어 의병을 모으고 군량을 거두어 근왕(勤王)하던 차 적도(賊徒)가 섬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고 돌아왔다.
동년 6월에 사계선생의 천거로 오수도찰방(獒樹道察訪)에 제수되어 부임 즉시 직무에 전력, 역로(驛路)의 질서가 회복되었는데 공이 부모를 멀리 떠나 있음에 불안하여 얼마 후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5년 丁卯(1627)에 후금(後金)에서 우리 나라를 침범하였는데 때에 사계 선생께서 양호(兩湖) 충청도 전라도(忠淸道 全羅道)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의병을 모집할 때 공을 불러 참모관(參謀官)을 삼고 방책을 자문함에 그에 응하여 전력하였다.
8년 庚午(1630) 12월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고, 14년 丙子(1636) 7월에 기린도찰방(麒麟道察訪)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한편 동년에 후금(後金)의 오랑캐들이 또 침법하자 아우 도(棹)로 더불어 의병을 모으고 군량을 거두어 운암 이흥발(雲巖 李興浡)의 진(陣)에 가담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진군(進軍)하던 도중, 청주(淸州)에 이르러 화의(和議) 성립의 소식을 듣고 통곡 끝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丁丑(1637) 윤 4월 왕자사부(王子師傅사부)로 특명이 내렸으나 나가지 않고 더욱이 세상에 나설 뜻이 없어 산중에 집을 짓고 전원(田園)에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면서 한가히 지내니 학도들이 많이 모여들어 공에게 학문을 익히었다.
20년 壬午(1642)에 10월에 부친 상을 당하여 집례(執禮)를 극진히 하고 복(服)을 마친 후, 27년 己丑(1649)에 인조(仁祖)께서 승하(昇遐)하신 소식을 듣고 도성(都城)에 다달아 조상(弔喪)하고 돌아오는데 당시 대신 이시백(大臣 李時白)이 공의 귀향(歸鄕)을 만류하며 이르기를 『현류(賢類)들이 바야흐로 모아드는데 공은 왜 머무르지 않고 가려는가?』하니 공께서 끝내 뿌리치고 돌아 왔다.
효종(孝宗) 원년 庚寅(1650) 정월에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 諮議)로 조정에서 불렀는데 공께서 탄식하여 으르기를 『주상(主上)의 소명(召命)이 이르렀는데 병으로 능히 나가지 못하니 신하의 예를 크게 잃었도다』하시었다. 이때에 아우 도(棹)가 과거에 응시(應試)하려다가 공의 병환이 위중함을 듣고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오니 공께서 아우더러 가사를 부탁하였다. 한편 계모(繼母)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종양(終養)하지 못함을 크게 한(恨)하고 임종(臨終)에 시자(侍者)더러 자기를 일으키도록 하더니 의관(衣冠)을 갖추고 계모(繼母)에게 인사를 드린 후 아뢰기를 『불초자 집(楫)이 종양(終養)을 못하고 슬하를 영영 떠나게 되니 지하(地下)에서도 눈을 감기 어렵습니다』하고 또 문생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금일에 그 바름을 얻지 못하였는가? 그 처음을 미루어 끝장에 돌아감에 온전히 살다가 온전히 돌아가니 다시 무슨 유감이 있으리오. 다만 노친(老親)을 염려할 뿐이다』하시고 손을 저어 부인을 나가도록 하고 말하기를 『남자는 부인의 손에 죽지 않는다』하고, 집안 자제들을 불러 훈계하는 언어가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辛卯 10월 11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7세였다. 문인(門人)과 지구(知舊)가 모두 변복 조곡(變服 弔哭)하고 고을 사람들까지도 눈물을 흘리며, 사방에서 시장을 철시(撤市)하기에 이르렀다.
전라관찰사 심택(全羅觀察使 沈澤)이 장계(狀啓)를 올려 나라에서 장례 비용을 급여, 동년 12월 17일 김제(金堤)고을 서쪽 갈공산 선영(葛公山 先塋)의 묘좌(卯坐)에 장례를 모시었다.
노봉 민정중(老峰 閔鼎重)이 당시 본도 어사(本道 御使)로 내려와 장계(狀啓)를 올려 아뢰기를 『고자의 류집(故諮議 柳楫)이 학행(學行)으로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이 있고, 또 고향에 거주하면서 교육에 근면하니 학도(學徒)가 심히 많고 소문을 듣고 착하게 된 자가 또한 많았습니다. 신(臣)이 명을 받들고 호남(湖南)에 와서 들으니 류집( 柳楫)이 죽음에 그 문인이 상복(喪服)을 입고 장례(葬禮)에 따른 자가 수백인이었는데 사람마다 홈모하고 칭송하였습니다. 사제(師弟)의 예가 삼대(三代) 이후로 폐해진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이제 다시 보니 이는 참으로 드믄 일입니다』하였다. 효종(孝宗)께서 아름다히 칭탄하시고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의 증직을 내리시니 壬辰(1652) 5월 이었다. 한편 명유(名儒)들이 만사(輓辭)를 지어 애도(哀悼)하였으니 이를테면 신독재 김집(慎獨齋 金集), 장육당 조구석(藏六堂 趙龜錫),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 죽유 구형(竹牖 具瑩), 청하 권극중(靑霞 權克中), 명재 윤증(明齋 尹拯)등이었다.
한편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유림들의 발의로 김제 승반산(金堤 勝盤山) 밑에 사우(祠宇)를 건립, 공의 위패(位牌)를 봉안 예성(奉安 禮成)하였으니 때는 효종(孝宗) 4년 癸巳(1653) 6월 13일로 이른바 『白石祠』이다. 백석사(白石祠)의 상량문(上樑文)은 청하 권극중(靑霞 權克中)이 짓고 봉안문(奉安文)은 시남 유계(市南 兪棨)가 지었으며, 공의 행장은 병계 윤봉구(屛溪 尹鳳九)가, 묘갈명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각기 지었다.
배위 여산송씨(礪山宋氏)는 판관 유중(判官 惟中)의 따님으로 자녀를 두지 못하여 공의 계제 도(季弟 棹)의 장자 백영(伯榮)을 맞아 계자(系子)로 삼고 공께서 돌아가신 8년 후에 돌아가셔 공의 묘소에 합부하였다.
숙종(肅宗) 22년 丙子(1696) 12월에 일찍 본군 군수)本郡 郡守)를 지낸 창강 조속(凔江 趙涑)을 추배(追配)하였다. 고종(高宗) 5년 戊辰(1868)에 국령(國令)으로 훼철(毁撤)되었더니 39년 壬寅(1902)에 사림(士林)의 발의로 공의 묘소 곁에 단소(壇所)를 마련하여 향사(享祀)하다가 甲寅(1914)에 유론(儒論)이 일어나 사우(祠宇)를 복설하고, 공의 제씨 반곡 도(盤谷 棹)를 추배, 이듬해 乙卯(1915) 2월에 예성을 보아 이상 삼위(三位)를 향사하고 있다.
정조(正祖) 21년 丁巳(1797)에 공의 유고서(遺稿序)를 성담 송환기(性潭 宋煥箕)가 짓고, 동시에 어명(御命)으로 간행된 존주휘편(尊周彙編)에 공의 사행(事行)이 실리었다. 순조(純祖) 31년 辛卯(1831)에 공께서 저술하신 시(詩), 기(記), 서)書), 문(文), 소(疏), 서(序), 설(說), 묘명(墓銘), 부록(附錄) 등 5권이 간행되고, 고종조(高宗朝)에 전책(殿策), 집책(執策) 2권을 속간, 도합 7권이 중간되었다.
공의 후손이 주로 김제군 김제읍 신곡리(金堤郡 金 堤邑 新谷里)와 장성군 북이면 여률리(長城郡 北二面 呂律里)에 세거하고 있다.

※墓碣銘, 白石遺稿, 白石祠誌, 人物誌, 號譜.

[입력: ryuj 09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