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柳輊) 평간공(平簡公), Ryu, Ji, 생몰년:?-1499, 세:17
成宗朝 文臣, 左相公派,
서산 자미(西山 自湄)의 2자로 세종(世宗) 32년 庚午(1450)에 생원에 급제하고, 단종(端宗) 원년 癸酉(1453)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다.
한림(翰林)을 거쳐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로 재직중 2년 甲戌(1454) 11월, 문종실록(文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단종이 왕위(王位)에서 물러나자 부친 서산공(西山公)께서 관직을 버리고 해주 수양산(海州 首陽山)으로 들어가심에 앞서 따라 가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서 정양하고 있다가 친상(親喪)을 당하여 복제(服制)를 마치었다.
세조(世祖) 10년 甲申(1464)에 동지(同知)에 발탁되어 이듬해 훈련원부사(訓練院副使)를 거처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올랐더니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의금부(義禁府)에 갖치었다.
성종(成宗) 원년 庚寅(1470) 4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제수되고 이어 집현전교리(集賢殿郊理)를 거쳐 이듬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어 문양군(文陽君)에 봉해졌다. 3년 壬辰(1472) 11월 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에 제수되고 곧 우승지(右承旨)에 옮겼다가 5년 甲午(1474) 8월 좌승지(左承旨)에 전직, 이듬해 6월 도승지(都承旨)로서 지신사(知申事)를 행하였다.
동년 가을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가 7년 丙申(1476) 7월 왕의 생신에 위징십점소(魏徵十漸疏)를 손수 써서 병풍(屛風)을 만들어 왕에게 바치었다.
왕께서 포상(褒賞)의 글을 친히 써서 하교(下敎)하시기를 "경(卿)이 전에 승정원(承政院)에 재직중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고 보고 들은 대로 꺼리지 않고 나에게 다 주달(秦逵)하였다. 내가 경의 충성을 아름답게 여기어 중임(重任)에 발탁하였더니 이제 헤아려 보건대 남방(南方)의 백성들이 반드시 경의 은혜를 입으리라. 한편 정사(政事)의 여가(餘暇)로 임금의 그릇침을 바로잡고자 유념하고 경계하는 글을 병풍(屛風)에 써서 나의 마음을 은연중 깨우쳤으니 한결같은 경의 마음을 내 감히 잊으리오. 항상 좌우에 두고 보리라. 경이 나를 위하는 간절한 마음을 보답하는 뜻에서 의복 일습을 하사하여 경의 임금 사랑하는 마음을 표창하노라" 하시었다. 그리고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근엄하게 잘 보관하라 하시고 공에게 어주(御酒)를 하사 하시었다.
8년 丁酉(1477) 4월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제수되고 8월에 좌찬성 윤필상(左贊成 尹弼商)과 함께 주청사(秦請使)로 명(明)나라에 들어가 궁각(弓角)을 수매(收買)할 것을 청하였고 이듬해 정월 돌아와 복명(復命)하고 2월에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제수되었다.
10年 己亥(1479) 5월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승진하였더니 이듬해 4월 병조판서에 전임되어 11월에 아마 (兒馬) 한필을 하사 받았다.
12년 辛丑(1481) 11월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승진하고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옮겨 9월에 충청도진휼사(忠淸道賑恤使)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에 전임되었다.
16년 乙巳(1485) 3월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제수되어 5월에 말 한필을 하사받고, 18년 丁末(1487)에는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하여 호피(虎皮) 한 장을 하사받았다.
20년 己酉(1489) 11월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옮겼다가 이듬해 4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갔다.
22년 辛亥(1491) 건주(建州)의 야인(野人)들이 국경을 침범하자, 도원수 허종(都元帥 許琮) . 부원수 이극균(副元帥 李克均)과 함께 야인들을 토벌하였다. 이듬해 6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고 11월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제수되었더니 24년 癸丑(1493) 8월 좌참찬(左參簧)에 전직되었다.
연산군(燕山君) 4년 戊午(1498) 7월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제수 되었다가 얼마 후 병이나서 양천(陽川)으로 물러나 집에서 요양(療養)하고 있었는데 왕이 어의(柳醫)를 보내어 진찰하였다.
이듬해 己未 정월 8일에 돌아가시니 평간공(平簡公)의 시호가 내리었다.
묘소는 양천 월촌 술좌(陽川 月村 戌坐)에 있었는데 군사 기지(軍事 基地)로 편입되어 지난 丁未(1967)에 지금 김포군 고촌면 풍곡리(金浦郡 高村面 楓谷里) 산 111번지 임좌(壬坐)로 이장하였다.
배위 정경부인 평창이씨(貞敬夫人 平昌李氏)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희현당 영서(希賢堂 永瑞)의 따님으로 무후(無後)하여 공의 아우 직장 보(直長 補)의 3자 사정 은종(司正 恩宗)을 맞아 계자(系子)하였다.
공의 유사(遺事)는 출계 (出系) 12대손 유촌 병기(柳村 炳箕)가 지었다.
후손은 포천군 포천읍 자작리(抱川郡 抱川邑 自作里)에 살고 있다.
※朝鮮王朝寶錄, 國朝榜目, 輿地勝覽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