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기 (柳之起), 서곡공(西谷公), Ryu, ji-gi, 생몰년:1605~1671, 세:20
병자호란 화순의병 거의(丙子胡亂和順義兵擧義)
류지기(柳之起 1605~1671)
본관 문화(文化), 자(字) 익지(益之), 호(號) 서곡(西谷)으로 백천(百泉) 류함(柳涵)의 차자(次子)이고 지성(之性)의 아우다. 공(公)은 병자(丙子)년 난(難)에 맹주(盟主)였던 부친 류함(柳涵)을 모시고 거의(擧義)에 참여했다. 부친의 명(命)에 따라 문묵(文墨)을 주관하여 거의(擧義)에 참여한 병사의 수를 확인하는 일을 비롯하여 모의청(募義廳)에 헌납된 병량(兵糧) 및 취사(炊事) 도구(道具) 등과 거의(擧義) 일정(日程)을 매일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천성(天性)이 순후(淳厚)하고 지절(志節)이 강개(慷慨)하여 어렸을 적부터 일상의 언행에서 백천(百泉)의 유훈(遺訓)을 생각하며, 이를 지키고 되새겨서 혹여라도 땅에 떨어질까 두려워했다. 차자(次子)라 분가(分家)하여, 사는 집이 본가(本家)에서 조금 떨어졌으나 부모 섬기는데 관대(冠帶)하고 혼정신성(昏定晨省)하기를 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상중(喪中)에도 상례(喪禮)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으니, 주변에서는 오히려 그의 건강(健康)을 염려할 정도였다. 평소 형제간에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형제간에 마땅히 함께하며, 가솔(家率)을 단속하되 예(禮)로써 하였지만, 항상 온화한 기운이 집안에 넘쳤다. 사람을 대할 때는 관용(寬容)에 힘썼고, 의관(衣冠)을 갖추지 않고는 가까운 사람도 만나지 않았으며, 언행(言行)을 삼가고 조심했다.
『백천유집(百泉遺集)』의 「병자거의일기(丙子擧義日記)」는 그의 종군(從軍) 기록을 근거로 작성 한 것이다. 그는 화친(和親)의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와 부친의 뜻을 받들어 다섯 형제가 함께 뜻을 모아 서암(瑞岩) 산중에 환산정(環山亭)을 짓고, 백천공(百泉公)을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했다.
-백천유집(百泉遺集)-
[입력: ryuj 14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