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경(柳持敬), 수사공(水使公), Ryu, Ji-Gyeong, 생몰년:1576-1650, 세:22
仁祖朝 倡義 忠景公派, 자 덕구(德久), 호 죽옹(竹翁)
종부시소윤 한생(宗簿寺少尹 漢生)의 7대손이요 진안현감 여강(鎭安縣監 如岡)의 손이요, 증참판 헌(贈參判 憲)의 아들로 선조(宣祖) 9년 丙子에 나주(羅州)에서 태어났는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고 풍채가 헌걸차며 도량이 컸었다.
일찌기 선영(先塋)에 불이 나서 다 탔었는데 곧 묘하(墓下)에 달려가 산직인(山直人)을 불러 이르기를 "묘소 수호를 잘못하였으니 죄가 이보다 더 클 수없다"하고 매를 때린후 심히 통곡하니, 행인(行人)들도 공의 효성에 감복하였다.
30년 丁酉(1597)에 왜적(倭賊)들이 재침(再侵)하였는데 당시 공의 나이 22세로 유생(儒生) 진경문(陳景文), 민여안(閔汝顔) 등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원근에 격문(檄文)을 돌리고 임환(林懽)을 추대 의병장(義兵將)을 삼고 가산을 기우려 병기(兵器)와 기치(旗幟)를 만들어 군사의 위엄을 크게 떨치었다.
당시 석주 권 필(石洲 權韠)과 현주 조찬한(玄洲 趙纘韓)이 전라도(全羅道)에 와 있었는데 군중(軍中)에서 모두 말하기를 "권석주(權石洲), 조현주(趙玄洲), 이공(二公)을 얻어야 일을 성사할 수 있을 것인데 공이 아니면 그들을 맞이할 수 없다" 하였다. 이에 공은 즉시 달려가 그들을 설득하니 이공이 그 젊은 나이로 의리에 강개함을 보고, 공을 치하하여 마지 않고 마침내 허락하니 일군(一軍)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로써 예교(曳橋)의 싸움에 출전하여 임공(林公)으로 더불어 호두(狐頭)를 지키면서 적병을 대파시켰다.
36년 癸卯(1603)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주사랑청(籌司郎廳)에 전임 되었더니 얼마 안되어 다시 선전관(宣傅官)으로 병사 홍유의(兵使 洪有義)의 막하에 봉직하여 신임이 두터웠었다.
광해군(光海君) 2년 庚戌(1610)에 고성현령(固城縣令)으로 나갔는데 통제사 이경심(統制使 李慶深)이 말하기를 "수령으로서 선치(善治)는 류모(柳某)말 같음이 없다"고 칭찬하였다. 고을에서 정인흥(鄭仁弘)의 문정을 출입하는 자가 있자 공은 무슨 사건으로 그를 잡아 가두었더니 이로서 정인홍의 문도(門徒)에게 미움을 받아 마침내 파직 당하였다. 얼마 후 복관되어 선전관(宣傅官)을 거쳐 동관첨사(潼關僉使)로 나간다.
10年 戊午(1618)에 명 (明)나라에서 우리나라에 통첩하기를 군사를 징발하여 후금(後金)을 칠 것을 요청하였는데 당시 도원수 강흥립(都元帥 姜弘立)이 공에게 자기를 따라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공이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강홍립(姜弘立)이 출전하여 패하자 당시 상신(相臣)들이 공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감복하였다.
이공시발(李公時發)이 서도(西道)의 관찰사(觀察使)로 부임길에 도원수 장만(都元帥 張晩)에게 "공의 막하(幕下)에 신임할 자가 누구요"하고 묻자 장공(張公)이 공을 가르치며 칭찬하였다. 드디어 이공(李公)을 따라 서도(西道)에 있다가 얼마후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에 승진되고 이어 창원첨사(昌原僉使)로 나간다.
인조(仁祖) 2년 甲子(1624)에 황해도관찰사 임서(黃海適觀察使 林㥠)의 중군(中軍)으로 재직중 이 괄(李 造)의 반란이 일어났다. 공께서 정병(精兵) 30여인을 거느리고 적도의 동태를 살피다가 적을 만나 힘껏 싸워 적장(賊將) 수인을 목베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 삭녕(朔寧)까지 뒤쫒아 드디어 마전(麻田)에 이르러 적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임지(任地)로 돌아왔다. 이렇듯 전공을 세웠으나 시기하는 자들의 저지로 겨우 진무원종훈(振武原從勳)에 책록되고, 부모에게 추증(追贈)의 은전(恩典)이 내렸다.
곡산군수(谷山郡守) , 훈련원천총(訓鍊院千摠)을 거쳐 4년 丙寅(1626)에 진도군수(珍島郡守)로 나갔는데 이듬해 丁卯에 후금(後金)의 오랑캐들이 대거 침입하였다. 왕이 강화도(江華島)로 피난 하셨다는소식을 듣고 공께서 장교 서승춘(徐承春)을 시켜 전선(戰船)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가게 하고, 자신은 군병(郡兵)을 인솔하여 주야로 북상 도중 이성(尼城)에서 왕세자(王世子)의 행차를 배알하고 계속 올라가 강화도에 도착하여 행재소(行在所)를 배알(拜諸)하였다. 이윽고 난리가 끝난 후 사복장(司僕將), 철산부사(鐵山府使), 가덕첨사(加德僉使), 전주중군(全州中軍)을 거쳐 13년 乙亥(1635) 7월 공청도수사(公淸道水使)에 승진하여 몇달이 안되어 군함(軍艦)세척과 궁시(弓矢) 이천부와. 염초(焰炒) 수백근을 구비하는 한편, 군정(軍政)을 관대하고 간결하게 처리함으로 온 도내(道內)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때 자기의 봉록(俸祿)을 저축하여 선묘(先墓) 석의(石儀)를 갖추니 어떤 사람이 그것을 헐뜯어 말하므로, 공께서 이르기를 "내가 관직에 있기 30년에 선묘(先墓)에 묘석이 아직껏 없으므로 성묘할 때마다 슬픈 마음이 없지 않았다. 이제 천은(天恩)을 입고 절도사(節度使)가 되어 이제 못하면 다시 어느때를 기다리겠는가? 비록 벌을 받을지라도 달게 받겠다. " 하였다. 동년 11월 암행어사(暗行柳吏)가 그 석의(石儀)의 사건을 들어 마침내 파직, 검산산성(劍山山城)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사면되었다.
14년 丙子(1636)에 수어중군(守禦中軍)으로 재직중 청국(淸國)의 오랑캐들이 또 침입하여 주상(主上)께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란하실 때 호종(扈從) 하였다. 이때 전라병사 김준룡(全羅兵使 金俊龍)의 군대가 궤멸(潰滅) 당하여 그가 파면되자 공께서 중망(衆望)으로 그 군사를 지휘하여 패잔병을 수합하였다. 얼마 후 화전(和戰)이 성립됨에 군사를 해산하고 대궐에 들어가 왕을 배알하니 왕이 치하하시고 오위장(五衛將)을 제수하시었다. 그러나 당시 공의 나이 62세로 노환(老患)이 있어 관직을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후 수차 관직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효종(孝宗) 원년 庚寅 8월 6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5세였다.
공께서 12세에 손수 심은 나무로 관곽(棺槨)을 만들어 나주 아계(羅州 牙界). 지금 나주군다시면가운리 문암 후록 해좌(羅州郡多侍面佳雲里 文巖 後麓 亥坐)에 장례를 모셨으니 이곳은 공께서 만년에 살으신 곳이다.
공이 소시에 어떤 친구가 외직으로 델리 떠나면서 가산(家産)을 공에게 부탁하였는데 갑자기 왜란(倭亂)을 만나 창황한 중에도 끝내 그 재물을 보존하였다가 후에 그에게 돌려주니 그 사람이 칭탄하여 말하기를 "연소한 사람으로 감히 대할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관직에 있어 공사(公事)에 진력하여 이해(理害)를 따지지 않았고 여러번 탄핵(彈渤)을 입었으나 지조를 깨끗이 지켰기 때문에 평생에 집 한칸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또한 남에게 아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로는 영리(榮利)를 사절하고 선영(先塋)곁에 집을 지어 꽃과 대나무를 심고 스스로 즐기며 죽화(竹晝)를 그려 부치고 「죽옹(竹翁)」이라 자호하였다.
배위 서산류씨(瑞山柳氏)는 주부 휘진(主簿 彙進)의 따님으로 정숙하고 공손한 부덕(婦德)이 있었으며, 3남 5녀를 두고 돌아가시니 후에 합부하였다.
공의 묘갈명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지었으며, 묘하(基下)에 영당(影堂)이 있어 춘추(春秋)로 행사하고 있다.
장자 정(?)은 호 돈암(?庵)인데 종형(從兄) 화설당 운(花雪堂 運)과 함께 시골에 숨어 시부(詩賦)를 즐기며 지취(志趣)가 고상하였고, 2자는 천(遷)이요, 3자 하(遐)는 무과(武科)로 용천부사(龍川府使)를 지냈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에 광량(廣梁)을 지키면서 힘껏 싸워 참획(斬獲)이 많았으며, 사위는 홍생걸(洪生傑), 나성소(羅成素), 최간(崔侃), 이시빈(李時?), 송해붕(宋海鵬)이다. 그리고 서자에 구(?) , 수(隨) , 향(逈) , 진(進)이 있었는데 다 무후하였다.
공의 후손은 나주군 다시면 가운리(羅州郡 多侍面 佳雲里), 장성군 삼계면 삼계리(長城郡 森溪面 三桂里), 삼서면 대곡리(森西面 大谷里), 영암군 덕진면 장등리(靈岩郡 德津面 長嶝里), 금정면 안노리(金井面 姿老里), 신북면 월평리(新面面 月坪里)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
※ 朝鮮王朝實錄, 墓碣銘, 湖南節義錄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