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명(柳志明), 항일독립투사(抗日獨立鬪士), Ryu, Ji-Myeong, 생몰년:1882-1909, 세:33.
韓末義兵將, 殉國烈士, 忠景公派.
영암군수(靈巖郡守) 극양(克讓)의 13대손이요, 인숙(寅肅)의 손자요, 홍렬(洪烈)의 4남 2녀중 2남으로 완주군 화산면 화평리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전주이씨 사인(士仁)의 따님이다.
어려서 완고한 선비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이 배일사상(排日思想)이 투철한 학부교관(學部敎官) 상렬(相烈)에게 수학하고 24세때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배일 감정이 고조되자 의거를 도모코자 족숙에게 병서(兵書)를 연구하여 병법을 익히고 용담(龍潭) 출신 김치삼(金致三), 정성일(丁成一)등 동지들과 모의하여 각자 의병대를 조직하니 공의 휘하에는 김진사의 소작권을 관리하는 이성순(李聖順)을 비롯하여 류치복(柳致福)등 수십명의 부장과 수백명의 의병이 규합되었다. 이때 공은 삼남의병 대장, 창의대장이라는 직인을 찍은 격문(檄文)과 의병모집 취지문, 계식(戒飾) 취지물을 고을 여러곳에 써붙이고 총기류 수백정과 군량미 수백석을 함께 거두어 들었다.
많은 의병과 무기, 군량을 확보한 공은 부하를 거느리고 용담(龍潭), 고산(高山), 은진(恩津), 여산(礪山)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눈부신 항전을 계속하다가 1906년 9월 22일 용담 건무리에서 일본군과 최초의 교전을 갖고 적군에게 큰피해를 입히고, 동년 10월 3일 동지인 김치복 등과 함께 용담을 급습하여 일본인 “오오이시로쿠”등 3명을 살해하고 “쥬시모”등 5명에게 중상을 입힌다음 양총(洋銃) 2정을 노획했으나 이때 류치삼은 왜군에게 잡혀 일제에게 3심을 거쳐 교수형에 처해졌다.
공도 역시 다음해 7월 13일 일본 헌병에게 잡혔다가 지략으로 탈출하고, 그 틈을 타서 군기가 해이해지자 의병 윤병오(尹炳五)가 의병을 빙자하여 겁탈과 강간 등의 물의를 빚으므로 이를 불러 심히 꾸짖었으나 개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동년 12월 24일 부장 류치복으로 하여금 비봉면 대치리에서 처던하고 군률(軍律)을 재정비하여 일제의 우편취급소와 세무서 청사 및 일본인의 가옥 9동을 불태워 가슴에 사무친 원한을 풀었다. 이렇게 3년여의 항일 구국투쟁을 전개하던 공은 1907년 1월 23일 불행하게도 일본 헌병에게 다시 체포되어 3월 22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내란죄로 교수형을 언도 받은 뒤 2심, 3심을 거쳐 1909년 1월 23일 교수형에 처해져 망국의 통한을 품은채 고혼(孤魂)이 되었다.
1977년 12월 13일 박정희대통령은 공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제489호)을 추서하였다.
배위는 경주이씨 화래(化來)의 따님이요, 슬하에 1남 1녀를 두니 아들은 기선(奇善)이요, 딸은 은진임씨(恩津林氏) 시운(時云)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제창(濟昌)이다.
※獨立運動史資料集, 全北日報.
[입력: ryuj 09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