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선(柳智善), 참판공(參判公), Ryu, Ji-Seon, 생몰년:1498-1577, 세:18
明宗刻 文臣, 左相公派, 자 명중(明仲)
증좌찬성 종(贈左贊成 淙)의 증손이요, 증좌찬성 연(贈左贊成 演)의 4자로 연산군(燕山君) 4년 戊午 5월 포천자작리(抱川自作里)에서 태어났는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고 총명함이 그지없어 장성함에 경서(經書)를 두루 읽어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중종(中宗) 17년 壬午(1522)에 생원(生員)에 급제하고 26년 辛卯(1531)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보직되었더니 그 후 저작(著作). 박사(博士)를 거쳐 31년 丙申(1536)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고 호조(戶曹). 공조(工曹). 예조(禮曹). 병조(兵曹)의 좌랑(佐郎)을 두루 거치면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임하였다.
33년 戊戌(1538)에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승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겸임하고 이듬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35년 庚子(1540)에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이르고 이듬해 전설사제검(典設司提檢)을 거쳐 강계판관(江界判官)으로 나갔다가 얼마 후 파직되었더니 3년 후 복직 종성부사(鐘城府使)로 나갔었다.
명종(明宗) 2년 丁末(1547)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이듬해 2월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제수되고 얼마 후 승정원(承政院)으로 전직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5년 庚戌(1550) 4월 도승지(都承旨)에 이르고 6월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전직되었다. 이듬해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년후 내직(內職)으로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제수되고 7년 壬子(1552)에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가 정사(政事)의 여가로 족인(族人) 첨정 희잠(僉正 希潛)을 도와 가정보(嘉靖譜) 편찬에 공헌이 많았다.
10년 乙卯(1555)에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를 지내고 이듬해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갔더니 12년 丁巳(1557) 8월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제수되어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겸임하였다.
15년 庚申(1560) 7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이듬해 한직(閑職)을 원하여 여주목사(驪州牧使) , 인천(仁川) , 철원부사(鐵原府使)등을 두루 지내고 22년 丁卯(1567)에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제수되었다.
선조(宣祖) 4년 辛末(1371)에 개성유수(開城留守)에 제수되고 8년 乙亥(1575)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옮기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공은 천성이 온후하여 형제간에 우애가 독실하였으며 성실과 신의로써 사람을 대하고 명확하고 결단성 있게 일을 처리함은 물론 청렴과 근신을 스스로 지켜 고루한 시속(時俗)을 따르지 않았다.
선조(宣視) 10년 丁丑 정월 4일에 향년 80세로 돌아가시니 동년 3월 3일에 포천 두흡동 남록 미좌(抱川豆洽洞 南麓 未坐)에 장례를 모시고 비를 세웠는데 묘표는 조카인 영의정 전(領議政 㙉)이 지었다.
배위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생원 엽(生員 燁)의 따님으로 4남을 두었으니 강(堈)은 감찰(監察)이요, 첩(堞)은 백부 인선(伯父 仁善)후로 출계하고, 성(城)은 별제(別提)요, 한(堞)은 찰방(素訪)이다.
공의 증손 대에 가서 종가(宗家)로 출계(出系)하고 남어지는 절손(絶孫)되었다.
영조(英祖) 11년 乙卯(1735)에 공의 종육대손(從六代孫) 생원 세주(生員 世冑)가 포천읍 선단리(抱川邑 仙壇里) 동구 밖에 세장비(世葬碑)를 세워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 墓表, 抱川邑誌, 丁巳譜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