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진 (柳鎭)

류진 (柳鎭), 문화군(文化君), Ryu, Jin, 생몰년: , 세: 12,
고려 공민왕조 음사, 초휘 구(丘)

공은 정신공 승(貞愼公 陞)의 손이요, 장경공 돈(章敬公 墩)의 차자이다.
고려 공민왕조에 문음으로 출사하여 수주(隋州)·부평(富平)·경산(慶山)·강릉(江陵) 등의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는데 천성이 강직하여 가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배풀었다.
당시 요승(妖僧) 신돈(辛旽)이 왕의 총애를 받아 어향(御香)을 지참하고 각처의 명산을 두루 돌아다녔다. 이때 공은 강릉에 계셨는데 다른 고을 수령들은 모두 공복(公服)을 갖추고 나가 신돈을 맞이하였으나 공은 병을 핑계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에 신돈이 감정을 품고 왕에게 참소하여 공을 파직시켰다. 그후 신돈이 공을 자기에게 당기려고 공과 본래 친한 환관 김란(宦官 金蘭)을 포섭하여 권세로 위협하고 재물로 유인하였으나 공은 끝내 굽히지 않고 드디어 김란과도 교제를 끊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후에 중대광 문화군(重大匡 文化君)에 봉장(封爵)되었다.
평생에 신불(神佛)을 가까이 않고 성색(聲色)을 즐기지 않았으며, 검소함은 숭상하고 정숙함을 즐기었다.
임종(臨終)에 유언하기를『처자에게 이르노니 다투지 말지어다. 가문의 창성은 화목에 있느니라』하였다.
조선 세종조에 3자 영의정 정현(영의정 정현)의 귀히 됨으로 인하여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배위 춘천박씨(春川朴씨)는 판사복시사 거실(判司僕司射使 居實)의 따님으로 4남 3녀를 두었다. 아들 원현(元顯)은 검한성(檢漢城)이요, 운검(云儉)은 판사(判事)요, 정현(廷顯)은 영의정(領議政)으로 시호는 정숙공(貞肅公)이요, 정무(廷懋)는 판사(判事)이며, 사위는 계림군 경주이보림(鷄林君 慶州李寶林)·예의판서 청주경진(禮儀判書 淸州慶臻)·부사 광산탁복해( 光山卓福海)이다.
공의 묘소가 본래 양주 창화동(楊州 昌華洞)에 계셧는데, 실전되어, 고종(高宗) 37년 병자(1900)에 후손의 세거지인 김제군 공덕면 황산리 분토동(金堤郡 孔德面 黃山里 粉土洞)에 있는 공의 증손 함안군수 효용(咸安君守 孝庸)의 묘소위에 1964년에 설단하고  사단비(祀壇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양재 권순명(陽齋 權純命)이 지었다.
매년 음 9월 8일에 단사(壇祀)를 행하여 오다가 정신공장경공을 상위에 설단하고 2006년부터 음 9월 5일 향사를 올리고 있다.
. ※사단비문 추산록 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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