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징구 (柳徵龜)

류징구(柳徵龜), 수사공(水使公), Ryu, Jing-Goo, 생몰년:1683-1762, 세:23
英祖朝 武臣. 檢漢城公派, 자 성칙(聖則)

문양군 희럼(文陽君 希霖)의 5대손이요, 증호조참판 문욱(贈戶曹參判 文郁)의 3남으로 숙종(肅宗) 9년 癸亥 12월 25일 한양(漢陽)에서 태어났다.
장성함에 풍채가 헌걸차고 도량이 크더니, 38년 壬辰(1712)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내직으로 선전관(宣傳官) , 도총부도사 (都摠府都事) , 훈련원정(訓鑛院正)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주목사(羅州牧使) , 용천군수(龍川郡守) , 단천부사(端川府使) , 제주목사(滴州牧使)등 여섯 고을 수령과 삼도(三道)의 수사(水使)를 지냈는데 이르는 곳마다 학당(學堂)을 세우고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도표(圖表)로 만들어 백성들을 가르쳤다. 이로서 암행어사(時行御史)의 포계와 장상(將相)의 천거가 있었다.
영조(英視) 15년 己未(1739) 2월, 단천부사(端川府使)로 재직중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며, 22년 丙寅(1746) 윤3월에는 전임 제주목사(濟州牧使) 때 소청(疏請)한 장계(狀啓)가 받아들여져 호남(湖南) 연해의 고을에 쌓여 있던 쌀 200석을 분급(分給), 제주(濟州)로 보내 해도(海,島) 백성들을 구원하는 특전이 베풀어졌다.
이상 관직에 있기 50년에 청렴(淸廉)으로 일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80세 되던 壬午(1762) 수직 가선대부(壽職 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고 동년 8월 22일 돌아가시니 광주 오금리 선영 갑좌(廣州 梧琴里 先塋 甲坐)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甲申(1764)4월 22일에 영조(英祖)께서 예조정량 장현경 (禮曹正郎 張顯慶)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배위 정부인 경주이씨(貞夫人 慶州李氏)는 첨지 언빈(彦髕)의 따님으로 2남 3녀를 두고 묘소는 합부하였다.
아들 경성(景星)은 무과로 도사(都事)요. 익성(翼星)은 무과로 현령(縣令)이며 , 사위는 풍산홍중계(豊山洪重啓) , 사천목상경(泗川睦尙敬) , 경주이중희(慶州李仲禧)이다. 이밖에 서출에 아들은 득성(得星)이요,따님은 함양여기주(咸陽呂基周) , 여흥민사헌(驪興閔師憲) , 풍양조시열(豊壤趙時說)에게 출가하였다.
후손은 음성군 삼성면 능산리(陰城郡 三成面 陵山里) , 청원군 옥산면 오산리(淸原郡 玉山面 烏山里)에 세거하고 있다.
※ 朝鮮王朝實錄, 致祭文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