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종지(柳宗智), 조계공(潮溪公), Ryu, Jong-Ji, 생몰년:1546-1604, 세:20
宣祖朝 儒學者, 左相公派, 자 명중(明仲), 호 조계(潮溪).
증좌찬성 종(證左贊成 淙)의 4자 중군사정 사문(中軍司正 思問)의 현손이요, 증좌찬성 함(證左贊成 諴)의 장자로 명종(明宗) 원년 丙牛에 진주 원당리(晋州 元堂里)에 태어났는데 기질이 맑고 고상하며 용모가 단정하더니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문사(文詞)가 일찍 성취 되었다.
명종(明宗) 15년 庚申(1560)에 향시(鄕試)에 장원 하였는데 당시 선비들이 과거에 급급함을 보고 탄식하며 <과장(科場) 이 어찌 사군자(士君子)의 발을 들여놓을 곳이 되겠는가?>하더니 즉시 과거를 폐하였다.
일찍이 각재 하 항(覺齋 河 沆)과 같이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受學), 학문의 향방(向方)을 알아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등을 강론하고 성명이기(性明理氣)의 깊은 뜻을 탐구하였다.
남명(南冥)선생이 칭찬하여 이르기를 <류명중(柳明仲)은 천품이 고상하고 실천이 독실하니 나의 문하에 사람이 있도다.>라고 말하였다.
공이 일찍이 관동(關東:江原道)을 유람하러 가실 때 선생께서 강원감사(江原監司)에게 서신을 내어 이르기를 <문생 류군(門生 柳君)이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는데 명산(名山)에 가슴을 트이고자 풍악(楓岳)을 탐방하는 중이라>하였다. 그 스승의 추중함이 이와 같았고, 또한 동문 제공(同門 諸公)이 모두 일시의 명현(名賢)으로 서로 공경치 않음이 없었으니 이를 테면 옥계 노 진(玉溪 盧 禛). 갈천 임 훈(葛川 林 薰). 수우 최영경(守愚 崔永慶). 개암 강 익(介庵 姜 翼). 한강 정구(漢岡 鄭逑). 대소헌 조종도(大笑軒 趙宗道).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 각재 하 항(覺齋 河 沆).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대암 박 성(大庵 朴 性). 송암 김 면(松庵 金 沔)등이었다. 특히 최우수(崔守愚)와 좋아하여 천리 인욕(天理 人慾)과 공사 사정(公私 邪正)의 분별을 서로 밝혀 강론 분석하고, 취사 시비(取捨 是非)를 결단하니 사람들이 도의지교(道義之交)를 일컫을때는 반드시 양공(兩公)을 들어 말하였다.
공은 효도와 우애를 천성으로 타고나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상제(喪制)를 한결 주자가례(朱子家禮)대로 행하고 여묘(廬墓)로 3년을 마치었다. 또 모친을 섬김에 색양(色養)에 어김이 없었고 아우 종일(宗日)로 더불어 담장을 연하여 살면서 우애가 독실하였다.
일찍이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정릉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오직 학문에 전념하였다.
남명(南冥)선생께서 임종(臨終)에, 평소에 손수 써두었던 ‘士喪禮節要’를 공과 하공응도(河公應圖). 손공천우(孫公天佑)에게 주면서 치상(治喪)에 사용하도록 부탁하였다. 선생께서 돌아가심에 유언(遺言)대로 행하고 심상 삼년(心喪 三年)을 마친 후 선조(宣祖) 9년 丙子(1576)에 하각재(河覺齋)등 제현(諸賢)으로 더불어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지어 선생을 향사(享祀)하였다.
천성이 곧아 악(惡)을 미워하길 원수같이 여겼으며, 또한 언론(言論) 에 있어 시비(是非)를 분명히 가려 조금도 용서함이 없었고, 사람의 잘못을 보면 문득 배척하여 절대 가까히하지 않았다. 충군애국(忠君愛國)을 마음에 다지고 장의입절(杖義立節)을 기약하여, 수령(守令)과 방백(方伯)으로서 혹 탐오(貪汚)한 행실이 있다고 들으면 그가 와서 찾더라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를테면 경상도관찰사 권 엽(慶尙道觀察使 權 曄)이 공을 보기를 심히 간절히 하였으나 끝내 맞지 않고 말았다. 이로서 권 엽(權 曄)이 앙심을 품고 <류모(柳某)가 초야에 있으면서 조정을 멀리 한다.>고 장계(狀啓)를 올리었다. 공이 듣고 역시 글을 올려 사실을 변명하니 드디어 그는 파직되고 공은 무사하였다. 또 고향 사람이 권세에 아부하는 자 있거늘 공이 용납하지 않고, 왕왕 담화하는 가운데 그를 공격함에 그 사람이 심히 유감을 품고 끝내 공을 무고하였다고 전한다.
선조(宣祖) 22년 乙丑(1589) 겨울에 정여립(鄭汝立)이 반역죄로 잡혀 죽고, 그에 연좌된 일시의 명류(名流)들이 거의 하옥(下獄)되었는데, 최수우(崔守愚)가 공에게 서신을 내어 이르기를 <만사(萬事)가 모두 천명(天命)이나 다만 그 절의를 지킬 따름이다. 우리들이 평일에 독서(讀書)하였던 보람이 정히 이때에 있도다.>하였다. 드디어 체포령이 내림에 공께서 고령(高靈)에 계시던 중 손수 편지를 써서 일찍이 교류(交遛)했던 팔현 (八賢)에게 부쳐 이별을 고하고, 마침내 잡혀 국문(鞫問)에 굴복하지 않고 곤장(棍杖)의 극형(極刑)으로 돌아가시니 때에 겨우 44세로서 사우(士友)들이 모두 통분(痛憤)하고 애석(哀惜)해 마지 않았다.
후에 영남(嶺南)의 유림(儒林)들이 신원(伸寃)을 청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마침내 설원(雪寃)되었다.
광해군(光海君) 2년 庚戌(1610)에 대각서원(大覺書院)을 세워 공과 하각재(河覺齋)등 제현(諸賢)을 병향(倂享)하였다.
공의 유저(遺著)가 己丑 사화(士禍)에 없어지고 또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불타버렸는데, 고종 37년 庚子(1900)에 후손 세영(世永: 一名 基世)이 제현(諸賢)의 문집(文集)을 상고하여 ‘湖溪先生實記’1권을 간행하였다.
배위 진양하씨(晋陽河氏)는 교리 옥(敎理 沃)의 따님으로 2남을 두고 돌아가시니 진주 원당 선영하간좌(晋州 元堂 先塋下 艮坐)에 쌍분(雙墳)으로 모시었다.
장자 이영(伊榮)은 훈도(訓導)요, 차자 관영(關榮)은 봉사(奉事)이며, 후손이 진주 원당(晋州 元堂)을 비롯하여 산청(山淸), 하동(河東), 사천(泗川)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공의 행장은 홍문관수찬 김성탁(弘文館修撰 金聖鐸)이, 묘지명은 성산이승희(星山李承熙)가, 묘갈명은 여주이용휴(驪州李用休)가 지었다.
※朝鮮王朝實錄, 墓碣銘, 東?師友錄, 號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