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주(柳澍), 청헌공(淸軒公), Ryu, Joo, 생몰년:1568-1639, 세:21
光海朝 義士. 左相公派, 자 응림(應霖) 호 청헌(淸軒)
서산 자미(西山 自湄)의 5대손이요 사직 중번(司直 重蕃)의 아들로 선조(宣視) 원년 戊辰생이다.
문음(門蔭)으로 출사하여 사직(司直)으로 재직중, 광해군(光海君) 5년 癸丑(1613)에 적신(賊臣)들이 인목대비 (仁穆大妃)를 폐위하자는 소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다. 이 때 공께서 상소(上疏)를 올려 대궐에 들어가니 고을 사람들이 공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 상소에 『전하(殿下)의 나라를 망치는자는 정 조(鄭 造). 윤 인(尹 認)등 입니다. 또한 지금 삼사(三司)는 그 무리가 판치고 있사오니 청컨대 그들을 과감히 물리쳐 끊어진 윤기(倫紀)를 바로잡아야만 종사(宗祉)의 대제를 굳건히 할 수 있습니다.』하였는데 그 말이 심히 늠름하였다. 이를 보고 듣는 이마다 모두 놀라고 장차 큰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드디어 광해군의 진로(震怒)로 화가 헤아리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마침내 구원해 주는 이가 있어 금고(禁錮)의 형을 받고 포천(抱川)산중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인조(仁祖) 반정(反正)후 수차 관직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일체 나가지 않고 향년 72세로 돌아가시니 때는 인조 17년 己卯 3월26일 이었다.
배위 한양조씨(漢陽趙氏)는 부사 속(府使 速)의 따님으로 무후하고,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의창군 숙(義昌君 淑)의 따님으로 4남 2녀를 두고 93세로 돌아 가셨다.
묘소는 포천군 신북면 계류리(抱川郡 新北面 溪流里)전록 유좌(前麓 酉坐)에 합폄으로 모시고 묘소 우편에 지석(誌石)을 묻었다.
숙종(肅宗) 38년 壬辰(1712) 8월에 묘비를 세웠는데 수암 권상하(遂庵 權尙夏)가 비문을 짓고 도곡 이의현(陶谷 李宜顯)이 공의 전(博)을 지었다.
장자 헌길(軒吉)은 후릉참봉(厚陵參奉)이요, 2자 헌일(軒一)은 문원군 사(文原君 泗)의 6대손 충의위 밀(忠義衛 謐)의 후로 출계하고, 3자 헌철(軒哲)은 찬성공 종(贊成公 淙)의 6대손 사옹원봉사 항(司饔院奉事 航)의 후로 출계하고, 4자는 헌열(軒說)이며, 사위는 생원 이정국(生員 字正國)과 전주이시행(全州李時行)이다.
장자 헌길(軒吉)의 자는 덕여(德輿)로 선조(宣祖) 37년 甲辰(1604) 생인데 인조(仁祖) 11년 癸酉(1633)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음사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간신 김자점(奸臣 金自點)이 수차 좋은 관직으로 올려 주겠다고 꾀였으나 공은 끝내 거절하고 그 집 앞을 지나지 않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제기(祭器)를 간수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진주(晋州)에서 피란하다가 평정된 후 돌아왔다. 그 후 조정에서 관직으로 불렀으나 사양하고 포천 산중에 살면서 모친 봉양을 오직 낙으로 삼고 제족으로 더불어 화목히 지내다가 숙종(肅宗) 6년 庚申(1680)에 졸하니 향년 77세로 포천 외북 오촌 유좌(抱川 外北 梧村 酉坐)에 모셔졌다. 도곡 이의현(陶谷 李宜顯)이 공의 효행전(孝行傅)을 지었다.
※ 人物考. 號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