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준(柳浚), 사교당공(四矯堂公), Ryu, Joon, 생몰년:1584-1661, 세:20
仁祖朝. 學者. 夏亭公派, 자 징원(澄源). 호 사교당(四矯堂).
부제학 희저(副提學 希渚)의 증손이요, 현감 용공(縣監 用恭)의 손이요, 군자감첨정 몽익(軍資監僉正 夢翼)의 2자로 선조(宣祖) 17년 甲申 10월 13일 함안 관아(咸安 官衙)에서 태어나셨다.
효성과 우애를 천성으로 타고나 5세되던 해 부친께서 병으로 침(針)을 맞으심에 공이 놀래어 자기의 아픔같이 여기었다. 이에 부친이 공을 시험하고자 말하기를 “네가 만약 침을 맞는다면 나의 병이 낳으리라.”하니 , 공이 즉시 응답하고 대신 맞겠다고 하므로 부친께서 가상히 여기고 종이에다 천생효자(天生孝子)라고 써 주었다. 드디어 부친께서 돌아가시니 당시 공의 나이 8세였는데 홀로 있으면 문득 아버지를 부르며 우므로 모친께서 병이날까 걱정하고 약을 먹기를 강권하였으나 울며 듣지 않았다.
23세 되던 39년 丙牛(1606)에 진사(進士)에 급제, 성균관(成均館)에 있었는데 몸가짐이 단정하고 말이 적으므로 반궁(泮宮)의 유생(儒生)들이 모두 추중하여 마지 않았다.
인조(仁祖) 즉위 초에 훌륭한 유생(儒生)으로 광해군(光海君)때에 출사(出仕)하지 않은 이를 선발, 기용하였는데, 공이 그에 뽑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甲子(1624) 역적 이괄(李适)의 반란에 왕을 공주(公州)로 호종(扈從)하니 그 공(功)으로 주부(主簿)에 승진하였으나 어버이께서 년로(年老)하심을 들어 사직하였다. 곧바로 백형 해남현감 속(伯兄 海南縣監 洬)의 상(喪)을 당하여 모친을 모시고 나주(羅州, 현재는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고향으로 내려왔다. 얼마 안되어 모친의 병이 위독하므로 손가락을 깨어 주혈(注血)하였으나 효험이 없이 돌아가시자 매우 애통하여 거의 본성(本性)을 잃고 날마다 묘소에 찾아가 슬피 울며 밤에 자다가 꿈에 모친을 뵈이면 문득 일어나 통곡하여 마지 않았다. 묘소 앞 강가에 가어(嘉魚)가 많았는데 모친께서 생전에 즐기신 고기라 하여 종신토록 먹지 않았다.
7년 己巳(1629)에 사헌부감찰(司憲府감찰)및 상의원판관(尙衣阮判官)의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선영(先塋)을 멀리 떠날 수 없다 하고 사양하였다. 이곳에서 여생을 마칠 계획으로 한 집을 지어 사교당(四矯堂)으로 당호(堂號)를 부치고, 이로부터 세상에 뜻을 끊고 오직 고서(古書)를 읽는 한편 자제(子弟)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지극한 낙을 삼으니 고을의 학생들이 와서 묻고 배우는 자가 많았다. 향당의 부형(父兄)들이 장소가 협소함을 민망히 여기고 바로 그 곁에 집을 지어주니 공께서 분비재(憤渄齎)라 현판을 걸고 선배들의 규약을 쫒아 재중(齎中)의 절목(節目)을 갖추는 한편 권학문(勸學文)을 써서 벽에 걸고 학생들에게 권장하여 이르기를 “학문의 도리는 다름이 아니라 자식이 되어 마땅히 효도하고, 신하가 되어 마땅히 충성하며, 부부가 되어서는 마땅히 공손하고 분별이 있어야 하며, 어른과 아이들 사이에는 마땅히 차례가 있어야 하고, 친구간에는 마땅히 신의가 있어야 한다. 또 엄중한 스승이 눈 앞에 있으니 바로 경전(經傳)이요, 완강한 도적이 마음에 있으니 바로 물욕(物慾)이다.”하였다. 이렇듯 언행이 조리가 있고 규모가 정연하므로 종유하는 사우(士友)들이 매우 많았다.
평소에 자신을 위해선 매우 검박하였으나 선조(宣祖)의 기일(忌日)에는 반드시 5일을 재계(齋戒)하고 풍결(豊潔)히 행하였다. 백씨(伯氏)를 섬김에 매우 근실하고, 종족을 대함에 친목을 극진히 하며, 향당에서는 어진이를 벗으로 사귀고 불초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므로 누구나 공을 우러러 존경하지 않음이 없었다.
현종(顯宗) 2년 辛丑 9월 6일, 향년 78세로 돌아가시니 시복(緦服)을 행한 문도(門徒)가 50여인이었고, 원근에서 조객(皂客)이 수백인에 이르렀다. 묘소는 지금 영암 청풍원 갑좌(靈岩 淸風院 甲坐)에 모셔졌다.
돌아가신 5년후 乙巳(1665)에 공의 문인(門人)들이 모산(茅山)마을 남쪽 언덕에 사우(祠宇)를 건립, 죽봉사(竹峰祠)라 하고 제향을 올리더니, 후에 손자 상운(尙運)을 추배(追配)하였다.
배위 완산이씨(完山李氏)는 목사 경록(牧使 慶祿)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으며, 4남을 두어 성오(誠吾)는 현감(縣監)인데 백부 해남현감 속(海南縣監 洬)의 후로 출계하고, 신오(愼吾)는 교위(校尉)요, 창오(昌吾)는 생원(生員)이요, 형오(亨吾)는 진사(進士)이다.
공의 행장은 손자인 약재 상운(約齎 尙運)이 짓고, 묘갈명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지었다.
고종(高宗)초기 사우철폐령에 의하여 죽봉사(竹峰祠)도 역시 훼철되었다가 왜정(倭政)시대에 복설(復設)하였다.
※ 行狀. 萱碍銘. 人物誌. 號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