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중룡(柳仲龍), 어적공(漁適公), Ryu, Joong-Ryong, 생몰년:1558-1635, 세:20
仁祖朝 文臣. 忠景公派, 자 여현(汝見). 호 어적(漁適)
반곡 적(盤谷 績)의 계자(季子) 사직 정손(司直 正係)의 증손이요, 증참의 하(贈參議 賀)의 손이요, 증승지 유춘(贈承旨 有春)의 장자로 명종(明宗) 13년 戊午 12월 26일에 거창(居昌)에서 태어났다.
8 , 9세에 이미 성인(成人)의 도량이 있어 종일 꿇어 앉아 책을 읽더니 문사(文詞)가 크게 진취되어 17세에 지려부(紙驪賦)를 짓고, 또 우의진도음(寓意進道吟)을 지어 자신을 경계하였다. 덕계 오건(德溪 吳健)을 스승으로 섬겨 성리(性理)의 학문을 강구하여 사문(師門)의 추중한 바 되었다.
선조(宣祖) 15년 壬午(1582)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창석 이 준(蒼石 李 埈)으로 더불어 동방(同榜)에 급제, 더욱 우의(友誼)가 깊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문 위(文 緯) , 박 성(朴惺)등과 함께 창의 송암 김 면(松庵 金 沔)에게 합세(合勢)하여 우현(牛峴) , 상암(箱岩) 등지에서 적병을 방어하니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이로써 지방의 주민들이 이에 힘입어 전화(戰禍)를 면하였다. 김 면(金 沔)이 전장에서 전사하자 공이 김 자(金 滋)등과 더불어 호상(護喪)하여 장례를 치르고 또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를 도와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전략을 세워 왜적을 무찔렀다.
33년 庚子(1600)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36년 癸卯(1603) 10월 예조좌랑(禮曹佐郎)에 승진,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임하더니 39년 丙午(1606)에 『明宗實錄』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그후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광해군(光海君) 11년 己末(1619) 3월에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이 되고, 이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지낸후 금산군수(錦山郡守)로 나갔었다.
인조(仁禮) 즉위 후에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 . 교리(校理) ,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역임하고, 13년 乙亥 2월 24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8세였다.
동계 정 온(桐溪 鄭 蘊)이 만사(挽辭)를 지어 공의 사행(事行)을 추도(追悼)하였다. 묘소는 거창 월곡 선영 좌록 해좌(居昌 月谷 先塋 亥坐)에 모셔 있다.
배위 순천박씨(順天朴氏)는 증참의 광후(贈參議光後)의 따님이요, 팔거도씨(八莒都氏)는 홍문관교리 희령 (弘文館校理 希寧)의 따님이요, 인천이씨(仁川李氏)는 증한성우윤 구(贈漢成右尹 衢)의 따님이다.
2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 덕구(德?)는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음직 승훈랑(承訓郞)이요, 덕홍(德弘)이며, 사위는 연안이덕여(延安李德輿), 전의이경(全義李憬)이다.
※ 朝鮮王朝資錄, 追先錄, 丙辰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