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맹연 (柳孟連)

류맹연(柳孟連), 별좌공(別坐公), Ryu, Maeng-Yeon, 생몰년:1482-1540, 세:18
中宗朝 遺逸, 中門祇候使公派, 초휘 맹달(孟達). 자 수지(壽之).

광주목사 곡(光州牧使 穀)의 손이요 청백리 선산부사 희철(淸白吏 善山府使 希轍)의 장자로 성종(成宗) 13년 壬寅에 임천 만지동(林川 晩智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속문(屬文)과 시부(詩賦)에 능하더니 연산군(燕山君) 4년 戊午(1498) 3월에 사마 양시(司馬 兩試) 급제하였다.
중종(中宗) 12년 丁丑(1517) 11월 4일에 충청도관찰사 김근사(忠淸道觀察使 金槿思)가 장계(狀啓)를 올려 이르기를 『임천(林川)에 사는 생원 류맹연(生員 柳孟連)은 부친이 병환으로 여러 달을 자리에 누웠을때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며 병세가 위독하자 분뇨(糞尿)를 맛보아 치료하고 돌아가심에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무릇 상제(喪制)의 의식(儀式)을 한결 가례(家禮)에 쫓아 행하고, 계모(繼母)가 계셨는데 왕래하면서 반드시 문안(問安)을 드리되 자기집 문앞을 지나면서도 자기 집을 먼저 들어가지 않았다 합니다. 또한 재주가 뛰어나고 도량이 크오니 임용하실 것을 가히 천거하옵니다 』하였다. 이로서 유일(遺逸)로 참봉(參奉)에 제수되고 이어 빙고별제(氷庫別提)에 제수되었다.
일찌기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로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면서 세도(世道)를 만회하고자 하였는데 14년 己卯(1519)에 사화(士禍)가 일어나 현류(賢類)들이 거의 죽고 공 또한 연루됨에 세상에 뜻을 끊고 고향 임천으로 물러나 자취를 감추었다. 혹 어떤 사람이 시사(時事)를 물으면 끝내 응답하지 않고 다만 효제(孝悌)의 도리를 행하며 청백리(淸白吏) 집안의 전통을 지키고 시문(詩文)으로 여년(餘年)을 보내다가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35년 庚子 2월 17일 이었다.
배위 백천조씨(白川趙氏)는 충의위 계근(忠義衛 季墐 )의 따님으로 2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 창이(昌耳)는 사직(司直)이요 주이(周耳)도 사직이다. 사위는 현감 김약둔(縣監 金若鈍) , 감찰 창녕성경원(監察 昌寧成景元) , 주부 여산송홍(主簿 礪山宋泓)이다.
후손은 주로 부여군 충화면 만지리(扶餘郡 忠化面 晩智里) , 복금리(福金里) , 은산면 내지리(恩山面 內池里) , 보령군 웅천면 두룡리(保寧郡 熊川面 杜龍里)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 己卯名賢錄.

[입력: ryuj 09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