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만수 (柳曼殊), 좌상공(左相公), Ryu, Man-Soo, 생몰년: ?-1398, 세: 13, 左相公派祖
태조조 상신, 자 득휴(得休).
공은 장경공 돈(章敬公 墩)의 손이요, 우부대언 총(右副代言 總)의 아들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음사(蔭仕)로 보마 배행수(寶馬陪行首)가 되고 12년 계요(1363)에 장군(將軍)이 된후 여러 관직을 거쳐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랐다.
우왕(우왕)초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재직중 양백연(楊伯淵)의 옥사(獄事)에 연좌되어 독곡 성석린(獨谷 成石璘)과 함께 합포(合浦)로 유배되었더니 바로 방면되어 동북면순문사(東北面巡問使)로 나가 호구(戶口)를 점검하고 돌아와 만호(萬戶)를 거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3년 정사(1377)에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황해도(黃海道)에 침입한 왜구를 무찔러 공을 세웠다.
9년 계해(1383) 2월에 왜선120척이 남해를 침입했는데 공은 당시 경상도원수로서 정지(鄭地)의 지원을 받아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왜선 17척을 침몰시키고 그들을 격퇴시켰다.
14년 무진(1388)에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威化島)회군(회군)에 공을세워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승진하였다.
창왕(昌王)즉위 초에 왜선 20여척이 해주(해州)근방을 노략질함에 이방원(李芳遠)과 함께 나가 왜적을 몰아내고 그 공으로 궁시(弓矢)를 하사받았다.
공양왕(恭讓王) 원년 정오(1390) 4월. 워화도 회군 일등공신에 책록됨과 아울러 전답과 녹권(錄券)을 하사받고,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로서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을 겸임하였다.
순군만호(巡軍萬戶)로 재직중 이괄(李括)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다가 사헌(憲司)의 탄핵을 받고 판개성부사(判開城府사)로 좌천되었더니 곧 바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전직되었다.
조선개국후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됨과 아울러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使)에 제수되고, 이어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을 거쳐 태조(太祖) 7년에 무인(1398) 4월에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승진되었다.
동년 8월, 소위 제 1차 왕자란(王子亂)에 공의 위엄과 몀망을 시기하던 간당(奸黨)들의 무고로 동월 26일 밤에 피살되고, 또한 장자 원지(原之)도 동시에 피살되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등이 세자 방석(世子 芳石)을 옹호하고, 태조의 전실 한씨( 韓氏)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모의하던차, 무인 8월에 태조가 병으로 26일 밤에 찬성 류만수(贊成 柳曼殊)의 집으로 이어(移御)하게 되었다. 정도전 등이 이를 계기로 왕자들을 궐내(闕內)로 불러들인 후 작란(作亂)하려 하였는데 이무(李茂)가 또한 정도전의 당인(黨人)으로 그 모의를 정안군 방원(靖安君 芳遠)에게 밀고하였다. 이에 정안군이 영추문(迎秋門)으로 나가 수하를 보내어 정승 조준(趙浚)과 김사형(金士衡)등을 부르고, 다시 삼군부(三軍府)문전에 돌아와 말을 멈추고 있는데 때가 밤 사경(四更)이었다. 이를 눈치 첸 관원들이 서로 모여드는데 찬성 류만수도 아들 원지를 데리고 나와 정안군을 배알하였다.
정안군이 묻기를 『무슨 까닭으로 왔는가?』하니 류만수가『오늘 밤에 주상(主上)께서 저의 집으로 이어 하신다 하였는데 이제까지 오시지 않고 또 듣기를 변고(變故)가 있다길래 시위하고자 급히 왔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정안군이『갑옷을 가지고 왔는가?』하고 붇자 류만수가『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정안군이 즉시 갑옷을 내주면서 『나의 말 뒤에 서있으라』 명하였다. 이때 이천우(李天祐)가 『류만수도 정도전의 당이니 죽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말하자 정안군이 『옳지 않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회안군 방간(懷安君 芳幹)과 이천우가 강경한 어조로 『이같이 급한 때에 중의(衆議)를 막아서는 아니됩니다』고 말하자 정안군이 이숙번(李叔蕃)을 돌아보며『형세가 어쩔수 없으니 죽이라』고 명하였다. 류만수가 곧 말에서 내려 정안군의 말고삐를 잡고 『나는 결단코 결백하옵니다 』고 하는 찰라 궁노 김소근(弓弩 金小斤)이 칼로 목을 내리 쳤다.
정안군이 류만수의 아들 류원지에게『너는 죄가 없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하므로, 류원지가 망극한 슬픔을 억누르고 돌아오는데 회안군 방간이 예빈문 앞까지 쫒아와 류원지의 목을 베었다.
얼마 후 왕자 방번과 방석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정안군이 이숙번에게 은밀히 말하기를『류만수도 내가 그 목숨을 보전코자 하였는데 하물며 골육(골육)을 죽이다니, 지금 인심이 안정되지 못한 때문에 내가 참고 노기를 보이지 않노라』하였다.
이상은 실록(實錄)에 게재된 대로임을 밝혀 둔다.
이로서 공의 관작이 강등되어 찬성(贊成)이 되었으나 세종(世宗)5년 계묘(1423)에 신원 복직(伸寃 復職)되었다.
공께서 일찍이 무속(巫俗)의 음란한 행위를 규탄 근정시켰는데 지금까지 무당들의 노래에 공의 이름을 들치는 가사(歌辭)가 전해오고 있다.
공의 묘소가 양주 무둔산(楊州 無屯山).용인 구수동(龍仁 九水洞). 양근 서종면 중대(楊根 西終面 中臺)라고 하나 실전되고, 지금 양주군 남면 경신리(楊洲郡 南面 庚申里)에 있는 배위묘소에서 합사하고 있다.
배위 영숙택주 남양홍씨(寧淑宅主 南陽洪氏)는 남양군 주(南陽君 澍)의 따님인데 3남 3녀를 두어 장자 원지(原之)는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使)로 부친과 동시에 돌아가시고, 2자 은지(殷之)는 도총제(都摠制)로 시호 황호공(荒胡公)이요, 3자 연지(衍之)는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냈으며, 사위는 대경 진주강중경(大卿 晉州姜仲卿)·판서 능성 구성우(判書 陵城具成佑)·직장 한산이문호(直長 韓山李文浩)이다.
영숙택주 홍씨께서 부군과 장자를 동시에 여의고, 창황한 나머지 장방(長房)의 손자 셋을 거느리고 친정(親庭)인 양주 경신리로 피란하여 손자들을 장성시키고, 85세의 고령(高齡)으로 돌아가시니 이 마을 앞산 언덕 자좌(子坐)에 묻히셧다.
영조(英祖)7년 신해(1731)10월에 개비(改碑)하였는데 외예(外裔)인 좌의정 덕수이집(左議政 德水李집)이 비문을 짓고, 13대손 세모(世模)가 글씨를 썻다.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영숙택조묘표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