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몽학(柳夢鶴), 극암공(克菴公), Ryu, Mong-Hak, 생몰년:?-?, 세:18
宣祖朝 遺逸, 夏亭公派. 호 극암(克庵).
형조판서 안숙공 계문(刑曹判書 安肅公 季聞)의 2자인 종성부사 보(鐘城府使 䀯)의 증손이요, 훈(壎)의 2자인데 종숙 증사복시정 균(從叔 贈司僕寺正 均)의 후로 출계(出系)하였다.
일찌기 일재 이항(一齋 李恒) 선생 문하에서 수업,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통달하여 사우(士友)의 추중 (推重)을 받았다.
선조(宣祖) 6년 癸酉(1573) 12월 조정에서 각도에 숨은 선비를 천거하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이때 공께서학문(學問)과 조행(操行)으로 천거를 받았다.
이듬해 甲戌(1574)에 유일(遺逸)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제수되고 이어 집의(執義)에 올라 사직(辭職)을 청하니 율곡 이 이(栗谷 李 珥)가 만류하여 그대로 있다가 공조좌랑(工曹左郞)으로 전직 8년 乙亥(1575) 정월에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수변 후 복직되어 양양부사(襄陽府使)로 재직중 16年 癸末(1583) 12월 사직의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允許)를 얻지 못하고 얼마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배위 대구이씨(大邱李氏)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명분(命賁)의 따님으로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극신 (克新)은 진사(進士)로 증형조참판(贈刑曹參判)이요, 사위는 박수현(朴壽賢)이다.
후에 손자 통제사 정익(統制使 延益)이 귀히 됨으로 인하여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묘소는 양평군 강하면 동오리 후록(楊平郡 江下面 東梧里 後麓)에 모셔있으며, 후손은 대체로 용인군 외사면 옥산리(龍仁郡 外四面 玉山里). 화성군 향남면 상신리(華城郡 鄕南面 上新里)에 집단 세거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 典故大方儒賢錄. 號譜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