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몽익 (柳夢翼)

류몽익(柳夢翼), 증판서공(贈判書公), Ryu, Mong-Ik, 생몰년:1522-1591, 세:19
宣祖朝 蔭仕. 夏亭公派, 자 경남(景南)

예조참판 맹문(禮曹參判 孟聞)의 5대손이요, 거창현감 용공(居昌縣監 用恭)의 2자로 중종(中宗) 17년 10월 15일생인데 천품이 너그럽고 행실이 독실하여 효성이 지극하였다.
친상(親喪)에 여묘(廬墓)로서 예제(禮制)를 다하고, 형제자매로 더불어 우애가 돈독한 반면 학문에 힘써 수차 과거에 응시 낙제하고 출사(出仕)를 포기하니 청련 이후백(靑蓮 李後挑)이 시(詩)로써 풍자(諷刺), 출사를 권하였으나 마음을 흔들리지 않았다.
선조(宣祖) 즉위 초에 문간공 관(文簡公 寬)의 선음(先蔭)으로 발탁되어 사포서(司圃署) ,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 전생서(典牲署) ,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를 거쳐 7년 甲戌(1574) 정월 인동현감(仁同縣監)으로 나갔다가 얼마 후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형조정랑(刑曹正郎)을 지내고, 다시 함안군수(咸安那守)로 나가 흉년을 당하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는데 전력하였다. 이에 암행어사(暗行御史)의 계주(啓秦)로 의복 하사(下賜)의 은전(恩典)이 있었으며 고을 백성들은 비(碑)를 세워 칭송하였다. 그 후 군자감판관, 첨정(軍資監判官, 僉正)을 거쳐 다시 영덕현감(豊德縣監)으로 나가 겨우 일년에 치적(治績)이 드러남에 이웃 고을 수령(守令)들이 와서 치적의 요령(要領)을 배워갔다.
선조(宣祖) 24년 辛卯 윤 3월 5일 관아(官衙)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0으로 묘소는 영암군 금정면 서당동 송림산 임좌(靈岩郡 金井面 書堂洞 松林山 任坐)에 모셔졌다.
배위가 세분인데 함양박씨(咸陽朴氏)는 통례 두정(通禮 斗精)의 따님으로 무후(無后)하고, 청안이씨(淸安李氏)는 두남(斗南)의 따님으로 1녀를 두고, 여흥민씨(驪興閔氏)는 덕구(德龜)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속(洬)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郎)을 거쳐 해남현감(海南縣監)재직중 관아(官衛)에서 별세하고, 준(浚)은 호 사교당(四矯堂)인데 생원(生員)으로 향리(鄕里)에서 후학(後學)을 교도(敎導)하였으며, 사위는 현감 최응우(縣監 崔應虜) , 현감 이응명(縣監 李應蓂) . 진사 황정열(進士 黃廷悅)이다. 또 서자(庶子)에 부장 식(部長 湜)과 득(得)이 있었고, 서녀(庶女)는 첨사 손인갑(僉使 係仁甲)에게 출가하였다.
2자 준(浚)이 공의 행장(行狀)을 짓고, 청호 이일상(靑湖 李一相)이 묘표를 짓고, 동강 신익전(東江 申翊全)이 묘갈명을 지었다. 후에 증손 상운(曾孫 尙運)의 영귀(榮貴)로 말미암아 이조판서(吏曹判書)의 증직 (贈職)이 있었다.
※朝鮮王朝實錄, 墓碣銘.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