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몽정(柳夢鼎),학암공(鶴巖公), Ryu, Mong-Jeong 생몰년:1527-1593, 세:19
夏亭公派, 자(字) 경임(景任), 호(號) 학암(鶴巖)
公은 高陽公 順行의 曾孫이며 贈 嘉善大夫 兵曹參判이고 行司憲府 감찰(監察)이신 諱 用良의 三子로 1527년(중종22년) 10월 5일에 出生하시여 어려서 아버님을 여의고 홀로 學業에 힘써 31세(歲)에 향약(鄕約) 베풀어 규약(規約)을 강(講)하니 일향(一鄕)이 鄕先生으로 존칭(尊稱)하였으며, 1562년 公 36세에 가범구조(家範九條)
(別內外 남편과 아내의 할 일을 분별하며, 敎施誠 가르침에 정성을 베풀며, 學不倦 배움에 게으르지 아니하며, 盡吾職 나의 맏은 바 직분을 다하며, 尙勤儉 부지런함과 검소함을 숭상하며, 出量入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라.)을 定하여 壁위에 붙이고 스스로 警戒를 삼으셨으니 後孫들이 只今도 家訓으로 定하기도 하였으며
1567년에 生員進士試에 一等으로 합격하여 1568년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종6품)로 천거(薦擧)되어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종5품)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정6품)을 지내고 1574년 慶尙道 예안현감(禮安縣監)으로 별시(別試)에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 교리(敎理)(종5품)로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이 되고 장단부사(長湍府使), 나주목사(羅州牧使)을 거쳐 성균관 사예(司藝), 사헌부 장령(掌令) 겸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정3품) 歷任하고 왕명(王命)을 받드는 경차관(敬差官)이되여 관서지방을 돌아보시고 백성의 苦痛을 경감(輕減)할 것을 상소(上疏)하고 장령(掌令)에 배수(拜受)받고 1591년에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정3품)가 되고 1592년 임진(壬辰)년에 성절사(聖節使)로 중국에 가시어 중국 조정(朝廷)에서 베푼 연회(宴會)에 참석(參席)을 강요(强要)받고 우리 조선(朝鮮)의 임금님이 몽진(蒙塵)하여 존망(存亡)을 알지 못하는데 신하(臣下)된 자로써 무슨 면목(面目)으로 宴會에 參席하리오.하니 중조(中朝)에서 척연(惕然)여겨 참여(參與)하지 않음을 허락받고 뒤에 중조(中朝)에 충성(忠誠)과 근면(勤勉)을 다하고 병화(兵禍)을 입은 상황(狀況)을 자세히 고(告)하고 호곡(號哭)하며 청원(請援)하기를 여러 날 계속(繼續)하니 중국에서 감탄(感歎)하며 진(晉)나라의 호언(狐偃)과 월(越)나라의 범려(范蠡), 초(楚)나라의 신포서(申包胥) 같다.하며 구원(救援)하여 주기로 한 결정(決定)을 보고 돌아와 선릉(宣陵) 장례(葬禮)에 참여하여 왕(王)이 아직 해주(海州)에 계셔서 조속히 환궁(還宮)하시여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을 위로(慰勞)하기를 청(請)하였다.
공(公)이 초여름부터 몸이 좋지 아니해서 연안부(延安府)로 와있는데 병(病)이 더하여 서쪽을 향하여 난중(亂中)이라 왕(王)에게 복명(復命)못한 한(恨)을 품고 1593년 9월 5일에 졸(卒)하시니 공(公) 67세(歲)라 1595년에 현제 묘소로 반장(返葬)되고 그 뒤 이조(吏曹)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되고 다시 이조(吏曹)판서(判書)에 특증(特贈)되고 다시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 좌찬성(左贊成)(종1품)에 가증(加贈)되시였으며
묘소(墓所)는 충북(忠北) 충주시(忠州市) 노은면(老隱面) 안락동(安樂洞) 능내(陵內)부락 신좌(辛坐)의 언덕 선영(先塋)에 배위(配位)와 함께 모셔져 있다.
배위(配位)는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예안김씨(禮安金氏)는 봉사(奉事) 김응천(金應千)의 따님으로 공(公)과 동년생(同年生)으로 19세(歲)에 가례(嘉禮)를 올렸고 공(公)보다 8년 먼저 졸(卒)하셨다.
자손으로는 3자 1녀인데 장자(長子) 철(澈)은 백형(伯兄)의 뒤를 잇고 사자(嗣子) 영(泳)은 장례원(掌隷院) 사의(司議)를 지내고 셋째아들 연(沇)은 참봉(參奉)이 되고 딸은 판서(判書) 남이공(南以恭)에게 출가(出嫁)하고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인 손(孫) 충건(忠健)과 사어(司禦)를 지낸 증손(曾孫) 시량(時亮)과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인 현손(玄孫) 송제(松齊) 3대(代)가 효도(孝道)로 정려(旌閭)를 명(命)받아 공(公)의 묘소(墓所) 앞에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져 있다.
학암공(鶴巖公)이 성절사(聖節使)로 북경(北京)에 가실 적에 지은 3편(篇)의 시(詩)
1. 북경(北京)으로 가시며 용천(龍泉)에 이르러서
國破家亡萬里行(나라가 패하고 집은 망하는데 만리길을 떠나으니)
存亡家屬不關情(가속들의 존망은 정에서 관여하지 못하고)
龍泉仰見天顔後(용천에서 임금님의 얼굴을 우러러 본 뒤로)
無意人間一息頃(사람사이에 한번도 잠깐이라도 쉬어갈 뜻이 없네.)
2. 왜적(倭敵)이 이미 임진강(臨津江)을 건너 왔다는 소문(所聞)을 듣고
白日無光觸目悲(햇빛이 희미하고 보이는 것마다 슬프니)
客中心事有誰知(객지의 심사를 누가 알리오)
賊船已渡臨津水(적은 이미 임진강을 건너왔다 하니)
再造邦家未可期(국가를 회복하는 것은 가히 기약할 길이 없구나.)
3. 중전(中殿)께서 홀로 함경도 함산(咸山)으로 향(向)하였다는 소문(所聞)을 듣고
草川陽德路間關(초천에서 봄을 맞으니 길이 험하여 걷기도 힘든데)
匹馬行行草樹間(필마로 풀과 나무사이를 계속해서가니)
行酒靑衣何以異(청의를 입은 것과 술심부름이 무엇이 다르랴)
孤臣西塞淚潸潸(외로운 신하가 서쪽 변방에서 눈물만 흘리네.)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