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몽주 (柳夢周), 증참의공(贈參議公), Ryu, Mong-Joo, 생몰년: , 세 : 19
宣祖朝 蔭仕. 夏亭公派,
예조참판 맹문(禮曹參判 孟聞)의 5대손이요, 증좌승지 용겸(贈左承旨 用謙)의 3자로 중종(中宗) 25년 庚寅에 광주(廣州)에서 태어났다.
음사로 부사맹(副司猛)에 이르러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소사평(素沙坪)의 전투에 출전, 적은수로 많은 왜적과 싸우다가 아군(我軍)이 궤멸되자 공이 단기(單騎)로 적군의 포위망을 들고 분투하였으나 밀려 오는 적군을 막지 못하고 마침내 순절하였다.
난리가 평정된 후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책록됨과 아울러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배위 백천조씨(白川趙氏)는 희(羲)의 따님으로 2남을 두었으니 원서(元瑞)는 부사과(副司果)요, 형서(亨瑞)는 부사용(副司勇)이다.
묘소는 지금 황해도 연백군 금산면 여의랑리 자좌(黃海道 延白郡 金山面 如意郎里 子坐)에 배위와 쌍분으로 모셔 있다.
이조판서 안동김성근(吏曹判書 安東金聲根)이 공의 행장(行狀)을 지었는데 그에 이르기를 "나라를 근심하여 집을 잊고 삶을 버리어 의리를 취했으니 높은 절의와 당당한 충성은 천지에 우뚝하고 일월처럼 빛나리라. 인륜을 붙잡아 백대에 전하도록 없어지지 않으리니 어찌 조그만 공으로써 문자에 의지하여 일시에 영예를 자랑하는 자로 더불어 동일하게 말하겠는가?"하였다.
공께서 돌아가신 후 자손들이 바로 백천 식현(頗川 食峴)으로 이거하여 지금까지 수백호가 세거하고 있는데 문학(文學)과 행의(行誼)로 명성을 떨치었다. 乙酉(1945) 광복(光復)후 많은 후손이 월남(越南)하여 지금 서울을 중심으로 산거(散居)하고 있다.
※ 行狀. 丁巳譜, 世系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