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무 (柳懋)

류무(柳懋), 휴계공(休溪公), Ryu, Moo, 생몰년:1609-1680, 세:21
顯宗朝 儒賢 夏亭公派, 자 면지(勉之). 호 휴계(休溪肺).

안숙공 계문(安肅公 季聞)의 7대손 이요 선교랑 신민(宣敎郎 信民)의 아들로 광해군(光海君) 원년 己酉에 연산(連山)에서 태어났다. 자품(資稟)이 뛰어나고 지행(志行)이 고상하여 일찌기 신독재 김 집(愼獨齋 金 集) 선생의 문하에 수업 심오한 경지(經旨)를 궁구하여 당시 사우(士友)의 추중(推重)한 바 되었다. 한편 부모에 효성이 지극하여 취양(就養)에 어김이 없었고 또한 거상(居喪)에 치애(致哀)와 행사(行祀)에 지성 (至誠)이 향당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로 과업(科業)에 뜻을 끊고 산중에 은거(隱居)하여 오로지 학문 탐구에 열중하며 후학(後學)을 교도(敎導)함으로 일관하였다.
향당(鄕黨)의 천거로 수차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응하지 않더니 만년에 잠깐 나가 찰방(察訪)을 역임하고 곧 바로 돌아와 역시 후진 양성으로 평생을 마치었다.
숙종(肅宗) 6년 庚申 5월에 향년 72세로 돌아가시니 동년 9월 9일에 진잠(鎭岑) 남쪽 유천동 선영 묘좌 (柳川洞 先塋 卯坐)에 안장되었다.
공께서 돌아가시자 당대의 명유(名儒)인, 초려 이유태(草來 李惟泰) , 명재 윤 증(明齋 尹 拯) , 농은 윤 추(農隱 尹 推) , 안석기(安石起) , 강수 김 선(江叟 金 楦) , 남 휘(南 輝)등이 만사를 짓고 현감 최석유(縣監 崔碩儒)는 제문(祭文)을 지어 각기 애도(哀悼)하여 마지 않았다.
배위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진사 광원(進士 光元)의 따님이요 진주정씨(晋州鄭氏)는 달(達)의 따님이다.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대원(大遠)은 효행이 지극하여 고을에서 누차 정문(呈文)을 올린 바 있었으며, 사위는 전주이진갑(全州李震甲), 풍양조항보(豐壤趙亘輔)이다. 그리고 서출에 1남 1녀를 두어 소원(小遠)과 남중하(南重夏)의 첩(妾)이 있었다.
숙종(肅宗) 25년 己卯(1699)에 연산(連山)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공의 유허(遺墟)에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향현사(鄕賢祠)라 이름하고 31년 乙酉(1705) 11월에 공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향사 하였는데 봉안문(奉安文)은 소릉 최규서(小陵 崔奎瑞)와 파평 윤 유(坡平 尹 揄)가 짓고 향사축문은 역시 소릉 최규서가 지었다. 후에 공의 재종질 삼우당 문원(三友堂 文遠)과 참봉 전의이항길(參奉 全義李,洹吉) . 현감 광산김정망(縣監 光山金廷望) , 관찰사 안동권 수(觀察使 安東權 撻)를 배향하여 휴정서원(休亭書院)으로 개칭하였다.
고종(高宗) 戊辰(1868)에 국금(國禁)으로 훼철되었는데 근래에 연산(連山) 유림(儒林)에서 복설(復設). 향사 하고 있다.
공의 유고(遺稿). 「휴계집(休溪集)」이 숙종(肅宗) 말엽에 간행되었는데 서문(序文)은 숙종 12년 丙寅(1686)에 관찰사 권 수(觀察使 權 邃)가 지었다. 본래 유저(遺著)가 많았으나 자손이 미약하여 거의 유실되고 겨우 시문(詩文) 100여편이 2권 1책으로 전하고 있다.
완주군 화산면 화월리(完州郡 華山面 花月里)에 11대손 공렬(公烈)이 살고 있다.
※ 休溪集, 典故大方.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