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문원(柳文遠), 삼우당공(三友堂公), Ryu, Moon-Won, 생몰년:1638-1717, 세:22
肅宗朝 學者, 夏亭公派, 자 관보(貫甫). 호 삼우당(三友堂)
안숙공 계문(安肅公 季間)의 8대손이요, 계휴정 위(繼休亭 濬)의 증손이요, 광민(匡民)의 손이요. 감(憨)의 장자로 인조(仁祖) 16년 戊寅에 연산(連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품이 밝고 순수하며 용모가 늠름하더니 무릇 사물을 대함에 본말(本末)을 반드시 물어 뜻을 해득하고야마는 기질이 있었다. 18세에 이미 경전(經傳)의 대의(大義)를 깨달아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두고 과거 공부를 별로 하지 않더니 어버이의 명으로 향시(鄕試)에 응하여 다섯 차례나 합격하였으나 경시(京試)는 보지 않았다.
현종(顯宗) 12년 辛亥(1671) 4월 부친을 여윈 후로 모친을 봉양하되 지극히 효성스러워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집이 곤궁하여 항상 어머니를 넉넉히 대접하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더니 모친의 병환에 정성껏 간호하여 밤에 옷을 벗지 않고 약탕(藥湯)을 손수 다려 드리었다 그리고 상(喪)을 당해서는 곡읍(哭泣) 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며, 제사에는 3일을 재계하고 집안을 깨끗이 소제하고 행제(行祭)시에는 기운을 가라 앉혀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았으며 진퇴(進退)와 승강(升降)에 한결 예제를 쫒아 행하고, 제수(祭需)는 반드시 정결히 장만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지극히 춥고 비오는 여름이라도 성묘(省墓)의 예를 일찌기 폐한 적이 없었고, 절하고 일어날 즈음에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어 슬퍼하여 마지 않았으며,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가묘(家廟)에 배알한 후집 안팎을 깨끗이 쓸고 묘정(廟庭)의 풀을 손수 뽑아 깨끗이 하였다.
평생에 번거로움을 싫어하고 조용히 거처하여 말씀이 적었으며 네가지의 경계할 글을 지어 좌우명을 삼았다.
한가히 있음에 바라보면 엄연하여 가히 가까이 못하고, 다가서면 온화하여 술을 마신것 같았으며 겸손하여 남에게 묻기를 좋아하고, 물어오면 즐거이 가르쳐 주었다.
사서육경(四書六經)을 통독하여 성현(聖賢) 말씀의 본의를 구하고 조학(小學). 근사록(近思錄) . 심경(心經). 주자절요(朱子節要)등을 스스로 믿고 무자기(無自欺). 사무사(思無邪)로써 학문의 요체(要諦)를 삼았다.
자제들에게 항상 이르기를 "사람이 어려서부터 따뜻하고 배불리 지내면 혈기(血氣)에 병이 생길 뿐아니라 의사(意思)가 안일하여 반드시 일을 하고자않을 것이니 자녀들에게 비단 옷을 입히거나 고기를먹이지 말라"하고, "도를 나의 몸에 갖추라는 성현의 가르치심이 일월과 같이 밝으니 삼가 생각할지어다"하시고, 또 "성인의 가르침을 본받아 사람의 욕심을 다 버리고 천리를 온전히 지키라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내 마음속에 살피어 인욕이 천리에 섞이지 않고 천리가 인욕에 흐르지 않게 할 진대 그 행하는 바가 모두 중용(中庸)을 얻으리라" 하시고, 또 "군자와 소인의 분별은 다만 공경과 방자한 사이에 있을 따름이니 공경하면 천리가 있고 방자하면 인욕이 생기리라 "하시고 또 "참으로 돈독하고 공경하지 않으면 어제 능히 백사(百邪)를 이기어 천리를 유행(流行)하게 할 수 있겠는가"하시었다.
고을에서 누차 공의 학행을 조정에 천거하여 복호(復戶)의 은전이 내리었다. 숙종(肅宗) 43년 T酉에 돌아가시니 향년 80이었다.
배위 신평이씨(新平李氏)는 영룡(英龍)의 따님으로 2녀를 두고 후사가 없음으로 조카 최(最)를 맞아 계자(系子)하였으며, 따넘님은 청송심동상(靑松沈東相). 완산최항경(完山崔恒慶)에게 출가시켰다.
묘소는 지금 논산군 별곡면 반송리 봉동 선영하 병좌(論山郡 伐谷面 盤接里 鳳洞 先塋下 丙坐)에 합부로 모셔 있다.
공께서 돌아가신 후 사림(士林)의 공론으로 부안총림서원(扶安 東林書院)과 연산 휴정서원(連山 休亭書院)에 배향되었다.
논산군 가야곡면 종연리(論山郡 可也谷面 鐘淵里)공의 8대손 상은(相殷)의 집에 공의 언행록(言行錄)및 유집(遺集)이 약간 전하고 있다.
※ 言行錄, 典故大方享祠編, 號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