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문우(柳文祐), 청산공(靑山公), Ryu, Moon-Woo, 생몰년:1602-?, 세:23
肅宗朝 文臣. 侍郎公派, 자 도보(道輔).
전직영동정 총(殿直令同正 叢)의 9대손이요, 생원 정립(正立)의 장자로 선조(宣祖) 35년 壬寅에 청주(淸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서적(書籍)과 필묵(筆墨)을 떠나지 않고 가정교훈을 독실히 익히더니 중년이 넘어 생원(生員)에 급제하고, 59세 되던 현종(顯宗) 원년 庚子(1660) 11월에 주상의 등극을 하례하는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다.
2년 辛丑(1661) 12월, 성환도찰방(成歡道察訪)에 제수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7년 丙午(1666) 10월 청산현감(靑山縣監)으로 나가 제반 폐단을 제거하고 백성의 복지를 위해 과감히 정사를 행하니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생업이 안정되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옴에 말 등에는 행장이 초라하였고 백성들은 유임을 간청한 나머지 비석을 세워 선정을 칭송하였으며 그 선정비(善政碑)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배위 단양우씨(丹皓禹氏)는 홍량(弘量)의 따님으로 묘소는 지금 청원군 옥산면 사정리 유좌(淸原郡 玉山面沙亭里 酉坐)의 언덕에 부장으로 모셔있다.
2남 1녀를 두어 장자 진양(震陽)은 효종(孝宗) 2년 辛卯(1651) 9월 무과에 급제하여 칠원현감(漆原縣監)을 지내고, 차자 태양(泰陽)은 역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으며, 사위는 청주한필상(淸州韓弼商)이다.
팔계변영인(八溪卞榮仁)이 공의 묘갈명을 지었다.
후손은 청원군 북일면 도원리(淸原郡 北一面 挑源里) , 마산리(馬山里) , 옥산면 백산리(玉山面 白山里)에 세거하고 있다.
※ 國朝榜目 , 敎旨 , 墓碣銘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