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면호 (柳冕鎬)

류면호(柳冕鎬), 승지공(承旨公), Ryu, Myeon-Ho, 생몰년:1836-1914, 세:29
高宗朝 文臣, 侍郎公派, 자 주오(周五). 호 도은(陶隱).

취헌 이(醉奸 荑)의 I5대손이요, 진곡 일함(接谷 一咸)의 5대손이요, 양양부사 기풍(襄陽府使基豊)의 장자로 헌종(憲宗) 2년 丙申 2월 1일 청주 가중리(淸州 佳中里)에서 태어났는데 천품이 총명하고 음성이 맑아 경전(經博)을 읽으면 마치 물 흐르듯 하였다.
고종(高宗) 10년 癸酉(1873) 7월, 주상께서 경무대(景武臺)에 납시어 유생(儒生)들의 회강(會講)을 보시고 유학(幼學) 권봉집(權鳳集) , 류면호(柳冕鎬) , 생원 박주양(朴周陽) 3인을 선발하사 전시(殿試)에 응하도록 명하시었다. 동년 8월 증광문파(增蜜文科)에 급제, 흥문관교리(弘文諒校理), 수찬(修撰)으로 재임중 18년 辛巴(1881) 11월 도당(都堂)에 록선(錄選)되어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였다. 31년 甲午(1894) 7월 척화소(斥和煉)를 올려 외국과의 통상(通商)을 극구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2년 乙食(1905) 3월 종묘 대제(宗廟 大祭)에 봉폐관(對閉官)을 행하고 당상(堂上)에 승진 5월에 비서감승(祺書監丞)에 제수되었다.
 얼마후 일본과 보호조약(保護條約)이 체결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추요문답(芻堯問答) 동국춘추론(東國春秋論)등을 지어 의리(義理)를 밝히었다. 때에 나이 7순이 넘었지만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밤낮으로 식사를 잊을 정도였고, 한편 후생의 교육에 전념하여 순순히 지도하되 반드시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리를 강론하였다.
甲寅 3월 7일 졸하니 향년 79세로 청원군 남일면 장암리 서당동(淸原郡 南一面 壯巖里 書堂洞) 됫산 신좌(辛坐)에 안장되었다.
 배위는 초계변씨(草溪卞氏) 동돈령 홍기(同敦寧洪基)의 따님과, 부안임씨(扶安林f)가 계셨는데 모두 자녀가 없어 족제 영호漂流)의 2자 영설(永偰)을 맞아 계자하였다.
영설은 배위 서산정씨(瑞山鄭氏)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어 아들은 충식(忠植)이요, 따님은 은진송구영(恩津宋球泳)과 완산이범우(完山李範雨)에게 출가하였다.
자손은 청원군 남일면 가중리(淸原郡 南一面 佳中里)에 살고 있다.
※ 朝鮮王朝實錄, 家狀.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