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옥 (柳沃)

류옥(柳沃), 정간공(靖簡公), Ryu, Ok, 생몰년:1487-1519, 세:18
中宗刻 文臣. 中門祇候使公派, 자 계언(啓彦). 호 석헌(石軒).

안렴사 정(接廉使 靖)의 6세손이요, 훈도 문표(訓導 文豹)의 아들이다. 훈도공(訓導公)께서 일찍 자녀를 두지 못하여 영암 월출산(靈岩 月出山)의 신령(神靈)에게 빌어 성종(成宗) 18년 丁未에 창평 유곡(昌平 維谷)에서 공을 낳았는데 어려서부터 재질(才質)이 특출하여 신동(神童)으로 일컫었으니 9세에 광한전부(廣寒殿賦)를 짓고 14세에 영귀정기(詠歸亭記)를 지어 회자(膾炙)되었다.
15세 되던 연산군(燕山君) 7년 辛酉(1501)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21세 되던 중종(中宗) 2년 丁卯(150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 장원으로 급제하여 명성을 떨치었다.
이듬해 시종(侍從)의 반렬(班列)에 들었더니 4년 己巳(1509) 정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어 2월에 척신 홍경주(戚臣 洪景舟)의 전횡(專橫)을 극간(極諫)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고 동년 7월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전직하여 8월에 휴가(休暇)를 얻어 고향에 와 있었다.
이때 내수사(內需司)의 장리(長利)와 기신재(忌辰齋)의 용인(用人)을 혁파(革罷)할 것을 대간(臺諫)은 물론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들까지 연장(達章)으로 계청(啓請)하였으나 오히려 대간(臺諫)이 좌천되고 해결이 되지 못하니 왕께서 "류 옥(柳 沃)이 와서 시비를 분명히 가림을 기다려 결정하리라"하시었다. 공께서 휴가(休暇)를 마치고 돌아와 소명(韶命)을 받들고 입시(入侍)하여 시비를 분명히 가려 아뢰므로써 마침내 처리되었다. 이듬해 노친(老親) 봉양을 들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9년 甲戌(1514) 12월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제수되고 얼마 후 사간원헌납(司諫院點納)으로 전직되었다가 이듬해 2월 다시 홍문관(弘文館)으로 들어와 교리(校理)를 거쳐 전한(典翰)에 올라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를 겸하였다. 이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재직 중 노친(老親)의 봉양을 들어 외직을 청하여 무안현감(務安縣監)으로 나갔는데 정사(政事)를 잘 다스리니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잘 따라 공의 선정(善政)을 칭송하였다.
이에 앞서 중종(中宗)께서 즉위(卽位) 초에 부인 신씨(夫人 愼氏)를 마땅히 중전(中殿)에 책봉해야 바른 일이었는데 훈신 박원종(勳臣 朴元宗)등의 저지(沮止)로 폐위(廢位)되어 사제(私第)로 쫓겨나 있었다.
그 후 숙의 윤씨(淑儀 尹氏)를 왕비(王妃)로 책봉하니 즉 장경왕후(章敬王后)로서 乙亥년 봄에 원자(元子:후에 仁宗)을 낳고 산후병(産後病)으로 7일 만에 승하하여 곤위(坤位)가 비어 있었다. 왕이 후궁 박씨(後宮朴氏)를 총애하여 또 아들을 낳았는데 만약 승급(昇級)시켜 정비(正妃)에 책봉한다 해도 원자(元子)를 삼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리고 당시 재이(災異)가 연이어 일어남에 조정에서 구언(求言)의 교서(敎書)를 내렸는데 공께서 담양부사 박상(漂陽府使 朴祥). 순창군수 김정(淳昌郡守 金淨)과 함께 순창 강천사(淳昌 剛泉寺)에 회동(會同)하여 신씨(愼氏)의 복위(複位)를 청하는 상소(上疏)를 지어 훈신(勳臣)들이 임금을 겁제(怯制)하여 국모(國母)를 폐출(廢黜)한 죄를 극론(極論)하였는데 말이 심히 절직(切直)하였다. 때는 乙亥(1515) 7월로써 후세에 이곳을 일러 삼인대(三印臺)라 전해온다.
상소(上疏)가 작성된 후 충암(忠庵)과 눌재(訥齋)가 공에게 말하기를 "이 상소(上疏)가 올라가면 생사(生死)를 가히 예측하기 어려운 바, 우리 모두가 노친(老親)이 계시는데 우리는 형제가 있으나 그대는 형제가 없어 봉양하지 못하리라 만약 죽게 되면 효도를 상(傷)하게 된다. "하고 소중(疏中)에서 공의 이름을 빼버렸다. 상소(上疏)를 올린지 얼마 안되어 과연 충암(忠庵)과 눌재(訥齋)는 유배(流配)되어 죽고 공만은 상신 정광필(相臣 鄭光弼)이 힘써 구함으로써 면하였다.
12년 丁丑(1517) 9월 함경북도평사(咸鏡北道評事)로 재직증 상소(上疏)로써 군포징납(軍布徵納)등 오조(五條)의 폐단을 계진(啓陳)하고 이듬해 정월 내직으로 들어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제수되었다.
2월에 조강(朝講)에 입시(入侍)하여 민전(民田)의 한계와 노비(奴婢)의 수를 정할 것을 논하고 3월에 함경도(咸鏡道)에서 호포(戶布)를 횡렴(橫斂)한 사건을 계진하고 4월에 부령부사(富寧府使)로 나갔는데, 조정의 공론(公論)이 문신(文臣)을 외지(外池)에 보냄은 불가하다. 하여 곧바로 내직으로 들어와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간신 남곤(奸臣 南衰 )의 미움을 받아 7월에 고령첨사(高靈僉使)에 제수되고 금방 함경도 우후(咸鏡道 虞候)에 옮겼더너 또 바로 종성부사(鐘城府使)에 제수되었다.
공께서 즉시 독자(獨子)로서 늙은 모친을 멀리 두고 있는 정상을 아뢰고 사임을 간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곳에 부임하여 형벌(刑罰)을 간소히하고 정사를 청렴하게 다스리니 백성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였다.
부임한지 9개월만에 관아(官衙)에서 돌아가시니 때는 중종(中宗) 14년 己卯 3월 23일로써 겨우 33세였다.
참찬 윤자임(參贊 尹自任)이 왕께 아뢰기를 "이제 들으니 류옥(柳沃)이 죽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 하니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류옥은 사람됨이 공사(公事)에 힘써 사사(私事)를 돌보지 않았읍니다. 치부(致賻)의 예가 비록 법전(法典)이 있으나 그러나 시종지신(侍從之臣)이 죽었으니 마땅히 부전(賻典)을 별도로 베풀어야 하옵니다. 청하옵건대 예외(例外)의 은전(恩典)을 베풀고 애도(哀悼)의 뜻을 표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왕께서 대답하시 기를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으로 죽은 이가 하나 둘이 아니니 매양 특별한 부의(賻儀)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류옥은 나라를 위하여 가사(家事)를 잊었으므로 마침내 가난하여 능히 치상(治喪)을 못한다 하니 참으로 슬픈일이다. "하시고 본도 관찰사(觀察使)에게 하교(下敎)로써 치부(致賻)를 명하였다.
동년 4월에 고향인 창평(昌平)으로 반장(返葬). 지금 담양군 대덕면 비차리 원효통 내록 자좌(潭陽郡 大德面 飛?里 元曉洞 內麓 子坐)에 모시었다.
사신(吏臣)이 전(傳)에 이르기를 "류옥(柳沃)은 재주가 문무(文武)를 겸하고 또한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있어 사람들이 기특한 사나이라 일컫었다. 국가에선 혹 변진(邊鎭)에 임용하고 혹은 시종(侍從)과 대간(臺諫)에 임용하였는데 당시에 모두 그 기개(氣漑)를 아름다이 칭송하였다. 종성부사(鐘城府使)로 나가 불행히 병사(病死)하니 때에 나이 33세였다. "고 하였다.
배위 도강김씨(道康金氏)는 생원 희윤(生員 希尹)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두어 아들 강수(强首)는 사직(司直)이요, 강항(强項)은 처사(處士)이며, 사위는 참판 파평윤담(參判 坡平尹倓)이다.
공의 유집(遺集)과 실적(寶蹟)이 난리에 모두 없어졌는데 현손(玄孫) 야망당 동숙(野望堂 東淑)이 효종(孝宗) 8년 丁酉(1657)에 제현(諸賢)의 문집(文集)에서 유문(遺文)을 수습하여 겨우 1권을 만들어 집에 소장하였다.
영조(英祖) 20년 甲子(1744)에 삼현(三賢) 이 봉소(封疏)한 곳에 삼인대비(三印臺碑)를 세웠는데 도암 이재(陶庵 李縡)가 비명(碑銘)을 지어 이르기를 "삼선생(三先生)의 풍절(風節)은 름름하여 죽지 않았도다"하고 또 "선생의 의논이 비록 일시에 굴축(屈縮)되었으나 백세(百世) 후에 마침내 펴졌도다"』하였다.
정조(正祖) 12년 戊申(1788)에 순창 화산서원(淳昌 華山壽院)에 추배(追配)되었으며 23년 己末(1799)에 왕께서 박눌재(朴訥齋)의 치제문(致祭文)을 지었는데 그 일절에 "삼인(三印)의 그 누대(樓臺)는 만고에 이즈러지지 않으리라," 하시었다.
순조(純祖) 5년 乙丑(1805) 10월에 왕은 "고 전한류옥(故 典翰 柳沃)의 증시(贈諡)를 이조(吏曹)의 회계(回啓)에 쫒아 대신(大臣)들이 의논하라"하시고 바로 이조참의(吏曹參議)의 증직(贈職)을 내렸다.
철종(哲宗) 10년 己未(1859) 10월에 영의정 정원용(領議政 鄧元容)의 계주(啓奏)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고, 14년 癸亥(1863)에 이조판서 겸 홍문관 예문관대제학(吏曹判書 兼 弘文館 藝文館大催學)에 가증(加贈)됨과 동시에 정간공(?簡公)의 시호(諡號)가 내렸다.
공의 시장(諡狀)은 영어 김병국(潁漁 金炳國)이, 행장(行狀)은 현강 류승(玄岡 柳乘)이, 묘갈명(墓碣銘)은 금곡 송내희(錦谷 宋來熙)가,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수종재 송달수(守宗齋 宋達朱)가 각기 지었으며, 공의 문집(文集)인 석헌집(石軒集) 서문(序文)은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이 지었다.
※朝鮮王朝實錄, 石軒集, 神道碑銘, 輿地勝覽, 號譜

[입력: ryuj 09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