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팽노 (柳彭老)

류팽노(柳彭老), 월파공(月坡公), Ryu, Paeng-Ro, 생몰년:1554-1592, 세:19
宣祖朝 倡義. 左相公派, 자 군수(君壽). 형숙(亨叔), 호 월파(月坡)

문성군 수(文城君 洙)의 현손이요, 충주판관 경안(忠州判官 景顔)의 아들로 명종(明宗) 19년 甲子 2월 24일에 옥과 합강(玉果 合江)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복재 오수성(復齎 吳遂性)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선조(宣祖) 12년 己卯(1579)에 사미시(司馬試)에 급제하고 21년 戊子(1588)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제수되었다.
때에 부친께서 병석에 누워 계심으로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시탕(侍湯)에 정성을 다하다가 23년 庚寅 (1590) 정월에 상을 당하여 3년을 여묘(廬墓)하고 복제(服制)를 마친 25년 壬辰(1592) 3월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로서 박사(博士)에 제수 되었다.
당시에 3차의 상소(上疏)로서 양사(養士)의 도리는 삼대(三代)의 제도를 근본하여 득인(得人)을 위주해야 하고, 재이(災異)의 척결은 성의를 다하고 덕을 닦음으로써 구폐(救弊)의 근본을 삼아야 하며, 간언(諫言)을 받아들이고 공적(功績)을 상고하며 재물을 이용함과 양병(養兵)에 이르기까지 이르지 않음이 없었으며 특히 도리(島夷)의 침입을 방비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에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가 공의 상소(上疏)를 보고 그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칭탄하여 마지 않았다.
동년 4월 왜적(倭賊)이 침입하자, 양대박(梁大撲). 안영(安瑛) 등으로 더불어 창의하여 수백명을 거느리고 담양부(潭陽府)에 모아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고 공은 그 막하(幕下)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손수 격문(檄文)을 지어 각 고을에 돌렸던바 얼마 안되어 의거(義擧)에 참여한자가 수천명에 이르렀다, 즉시 왜적이 진치고 있던 금산(錦山)으로 다달아 공께서 여러 장사(將士)에게 이르기를 “금산(錦山)의 왜적은 그 수가 수만명인데 아군(我軍)은 오합지졸(烏合之卒)로써 그들을 당하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 요새지(要塞地)를 점거하고 있다가 적군의 교타(驕惰)함을 기다려 치는 것이 상책이라”하였다.
공께서 한쪽 눈이 적고 용모가 특출하지 못함으로 여러 장사(將士)들이 모두 업신여기어 그 계략을 쓰지 않고 마침내 진군(進軍)하여 혈전(血戰)끝에 적군에게 포위 궤멸(潰滅)당하였다. 그러나 공은 말을 채찍질하여 대장 고공(大將 高公)의 처소에 다달아 대장 고경명(大將 高敬命). 동종사관 안영(同從事管 安瑛)과 함께 장열(壯烈)한 최후를 마치니 이때 공의 나이 29세였다.
27년 甲牛(1594)에 공에게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의 증직이 내렸다.
37년 甲辰(1604) 정월, 전라도관찰사 장만(全羅道觀察使 張晩)의 장계(狀啓)에 “순창(淳昌)에 사는 생원 조응서(生員 曺應瑞)등 9인의 정서(呈書)에 고학유 증사간 류공팽로(古學諭 贈司諫 柳公彭老)가 임진왜란 초에 고판서경명(高判書敬命)으로 더불어 의기(義氣)에 분발, 함께 창의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곧 바로 군왕(君王)을 호위하기 위하여 의병(義兵)을 정돈, 북상(北上)하던 중 금산(錦山)고을이 왜적의 소굴이 되어 호남(湖南)의 위급함이 조석(朝夕)에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때 칠로(七路)가 붕괴하고 오직 호남(湖南)만이 온전하였는데 생각하기를 국가를 회복하는 근본이 다른데에 있지 않고 이에 있었음으로 먼저 이곳의 적병을 무찌르고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하기 위하여 금산(錦山)으로 다달아 적군과 맞서 싸우기 얼마 안되어 관군(官軍)이 무너지고 홀로 의병(義兵)만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으나 적의 수효는 많고 아군은 적어 전세(戰勢)를 지탱하지 못하고 진중(陣中)의 제현(諸賢)이 의병의 깃발 아래 모두 죽었습니다.
아아! 제현(諸賢)의 충열(忠烈)은 참으로 차등이 없으나 유독 류공(柳公)에 감회가 더욱 깊은 것은 왜로(倭奴)가 이미 진중(陣中)을 함락하여 어쩔수 없게 되자 모두 달아남으로 공의 노복(奴僕)이 말을 채찍질하며 아뢰기를 “일이 급합니다. 어찌 도망하지 않으십니까?”하니 공께서 묻기를 “대장(大將)은어디 계시느냐?” 함에 노복(奴僕)이 거짓으로 아뢰기를 “대장(大將)은 이미 도망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공이 잠시 후 대장이 뒤에 있는 것을 보고 즉시 말을 돌이켜 쫓아가니 노복이 말을 붙들고 울면서 달아날 것을 청하였으나 공이 듣지 않으므로 노복이 또 강경히 말리었습니다. 이에 공께서 칼을 빼어 치려고하니 노복이 별수없이 그만 두었습니다. 대장이 공을 보고 이르기를 “공은 건장한 말을 타고서 어찌 피하지 않는가?”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대장이 계시는데 어찌 먼저 도망하겠습니까?”하고 마침내 대장과 더불어 한곳에서 동시에 전사했습니다. 그 죽음을 초개(草芥)같이 여겨 조용히 순절하였으니 참으로 늠늠한 충열(忠烈)이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러보는 바로서 국가에서 의로운 충절을 아릅다히 숭상하고 충혼(忠魂)을 위로하는 뜻으로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을 이미 증직하셨으니 조정의 은전(恩典)은 참으로 지극하옵니다. 그러나 사간(司諫)은 삼품(三品)의 관작이라 이 분의 절의로 본다면 아직 만족하지 못하고 정려(旌閭)를 포상(褒賞)하는 한가지 일이 빠졌으니 이것이 선비들의 큰 한이 되는바입니다. 업드려 빌건대 장차 이사실을 조정에 알리고 대서특필(大書特筆)로 그 정려(旌閭)를 내리시면 특히 선생의 유골(遺骨)만이 아니라 구원(九原)에까지 은혜가 미칠것입니다. 또한 그곳에 사는 백성과 지나는 길손이 장차 손으로 가리키며 공경하여 이르기를 충신류공(忠臣柳公)의 정려라, 할것이니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공의 배위 김씨(金氏)가 슬픔을 못이겨 손수 칼로 자결하였으니, 가히 아름다운 남편에 아름다운 부인이라 말할수 있을 것입니다. 이 어찌 감격한바 있지 않으면 그러하겠습니까? 하였다.
이 장계(狀啓)로 말미암아 공에게 충신정려(忠臣旌閭), 부인에게 열부정려(烈婦旌閭)의 특전이 내려 지금도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谷城郡 玉果面 合江里) 마을 뒤에 정려(旌閭)가 있으니 세상에서 충열쌍성(忠烈雙性)이라 일컫고 있다.
한편 공께서 순절하신 즉시 공의 애마(愛馬) 오려(烏驢)가 공의 머리를 입에 물고 금산(錦山)으로부터 옥과(玉果)까지 달려와 문 앞에 떨어뜨리고 기운이 다빠져 그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부인께서 남편의 수급(首級)을 거두어 남원(南原) 고을 서쪽 생애동(生涯洞) 뒷산 기슭에 장사를 지낸 후 말은 마을 앞에 묻고 높이 무덤을 지어 지금까지 의마총(義馬塚)으로 불려오고 있다.
부인 김씨(金氏)는 관향(貫鄕)이 원주(原州)로서 침(琛)의 따님인데 공의 장례를 마치고 패도(佩刀)로서 자결을 꾀하였으나 곁에 사람의 구원으로 소생하여 겨우 1년 후에 돌아가시었다.
34년 辛丑(1601)에 광주(光州)에 포충사(褒忠祠)가 건립되어 고제봉(高霽峰)을 주벽하고 공이 배향(配享)되었으며, 인조(仁祖) 25년 丁亥(1647)에 금산(錦山)에 종용사(從容祠)가 건립되어 고제봉(高霽峰), 조중봉(趙重峰)과 함께 배향되어 지금까지 향사하고 있다.
현종(顯宗) 4년 癸卯(1663) 7월 나라에서 예관(禮官)을 보내어 충렬공 고경명(忠烈公 高敬命). 문렬공 조헌(文烈公 趙憲). 박사 류팽로(博士 柳彭老), 3인을 치제(致祭)하고 아울러 순의단(殉義璮)이라 사액(賜額)하였으니 이 단(璮)은 바로 이분들이 전사(戰死)하신 금산(錦山)에 있다. 그리고 동시에 공에게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의 증직이 내려졌다.
숙종(肅宗) 20년 甲戌(1694)에 옥과(玉果)에 영귀서원(詠歸書院)이 건립되어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를 주벽하고 공이 배향되었는데 고종(高宗) 5년 戊辰(1868)에 국금(國禁)으로 훼철되었다가 일제(日帝)로부터 해방(解放)된 후 복설(復設)되어 향사하고 있으며, 역시 해방 후에 옥과 유림(儒林)들이 옥산사(玉山祠)를 건립 공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향사하고 있다.
공께서 자녀를 두지 못하여 동파 증좌찬성 종(贈左贊成 淙)의 5대손이요, 나주판관 경례(羅州判官 敬禮)의 2자 담(蓞)이 입계(入系)하였는데 담(蓞)은 사마(司馬)에 급제한 후 순릉참봉(順陵參奉)을 지냈으며 그 후손이 곡성군 입면 금산리(谷城郡 立面 琴山里)등지에 살고 있다.
공의 행장(行狀)은 제봉(霽峰)의 계자(季子) 청사 고용후(晴沙 高用厚)가 지었다.
월파집(月坡集)의 초고(草稿)가 후손 종룡(鐘龍)의 집에 소장되어 오던 것을 丙寅(1986) 12월 전라남도(全羅南道)에서 도비(道費)로 영인(影印) 간행하였는데 발간사(發刊辭)는 전라남도지사 전석홍(全羅南道知事 全錫洪)이, 발문(跋文)은 장흥고동주(長興高東柱)와 방후손 한상(傍後孫 漢相)이 지었다. 그리고 파평윤요중(坡平尹堯重)이 행장(行狀)을 추보(追補)하고 황주변시연(黃州邊時淵)이 묘갈명과 의마총비문(義馬塚碑文)을 지었다.
※朝鮮王朝實錄. 興地勝覽. 月坡集. 潮南節義錄. 號譜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