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렴(柳濂), 죽봉공(竹峰公), Ryu, Ryeom, 생몰년:1534-1597, 세:20
宣祖朝 倡義, 夏亭公派. 자 子實
부제학 희저(副提學 希渚)의 曾孫이요, 현감 용공(縣監 用恭)의 손이요, 부사용 몽벽(副司勇 夢璧)의 아들로 나주 모산(羅州 茅山 :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서 태어났는데, 자질(資質)이 순후하고 효우(孝友)가 독실하였다.
선조(宣祖) 30년 丁酉(1597)에 왜적이 재침(再侵)하자 의기(義氣)에 분발하여 의병을 모으는 한편 무기 등을 갖추는데 혼신의 정력을 기우렸다. 적병이 수륙(水陸)으로 처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하동 노량 주룡포(朱龍浦)로 달려가 적과 대치하였는데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고립되고 후방의 지원이 끊기어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적병 수십명을 참휘하고 공 역시 이곳에서 전사(戰死)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들리자 왕은 가상(嘉尙)히 여겨시고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증직(贈職)하였다.
배위 금성라씨(錦城羅氏)는 송재 세찬(松薺 世纘)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경중(敬中)과 신중(慎中)이요, 사위는 현감 광주이태남(縣監 廣州 李泰男)과 별좌 나주나덕준(別坐 羅州羅德畯)이다.
묘소는 나주 서당동(羅州 書堂洞, 지금 영암군 금정면 서당동 선영하 해좌(靈巖郡 金井面 書堂洞 先塋下 亥坐)에 합폄으로 모셔있으며, 후에 송산사(松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아들 경중과 신중이 부친의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을 원통히 여기고 죄인으로 자처하여 폐양자(蔽陽子)를 쓰고 여막(廬幕)에서 평생을 바치였다
※湖南節義錄, 丁巳譜.
[입력: ryuj 090622] |